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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은 악필 … 그래도 남친 앞에선 창피해요

구름뜰 2015. 2. 4. 08:53

 

[젊어진 수요일] 터치에 빠진 2030
필기는 2G, 자판 치는 건 5G급
IT 익숙한 세대 … 손글씨는 퇴화
편지 보냈더니 주소 못 알아봐 반송
주관식 시험 감점될라 스트레스
대입·취업·고시 ‘손글씨’ 수요 여전
글씨교정 학원에 젊은 수강생 몰려
천재는 악필’ 속설 믿는 2030 많아
“컴퓨터 글꼴이 더 중요” 반응도

 
손글씨가 희귀해진 시대입니다. 특히 스마트폰·PC에 익숙한 청춘 세대에겐 펜을 잡고 글씨를 적어 내려가는 일이 어색하기만 합니다. 옛 동네가 철거되듯 손글씨가 영영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마저 듭니다. 손글씨에는 디지털 활자가 전해주지 못하는 사람의 온기가 있습니다. 이 온기는 진심을 실어 나르는 것이어서 우리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청춘리포트는 2030 세대의 손글씨 이야기를 취재했습니다. 악필과 명필 사이. 당신의 손글씨는 어디쯤에 있나요.


“당신의 손글씨는 어떻게 생겼나요? 좋아하는 구절을 써서 예쁜 손글씨를 보여 주세요.”

 최근 트위터·페이스북 등 SNS에서 ‘손글씨 인증’이 유행이다. 짧은 시구나 명언·노랫말 등을 직접 종이에 쓴 뒤 사진을 찍어 올리는 것이다.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거나 스마트폰을 터치하는 데 익숙한 청춘 세대에 손글씨는 이미 생경해져 ‘인증’ 대상이 된 지 오래다. 대학 강의실 풍경도 많이 달라졌다. 요즘 대학생들에게 손으로 필기하는 속도가 2G라면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는 속도는 5G급이다. 학생들은 노트북으로 강의 내용을 받아 치거나 심지어 스마트폰으로 수업 내용을 촬영하기도 한다. 고려대 3학년 임유리(22)씨는 “손으로 필기하면 교수님 말씀을 놓치는 경우가 많은데 노트북으로 받아 치면 토씨 하나 놓치지 않고 적을 수 있다”며 “수강생의 80~90%는 볼펜이나 샤프 대신 노트북 자판으로 필기를 한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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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로 청춘리포트가 20~30대 200명을 대상으로 ‘하루에 손글씨를 얼마나 쓰는지’를 온라인 설문조사한 결과 ‘다섯 문장 미만’이라고 응답한 사람이 66명(33%)으로 가장 많았다. ‘손글씨를 아예 쓰지 않는다’는 응답도 17.5%나 됐다.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청춘 세대가 손글씨와 멀어지면서 악필로 고민하는 20~30대도 늘고 있다. 같은 설문조사에서 ‘본인의 글씨체 때문에 불편을 겪거나 불이익을 당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절반 이상(56%)이 ‘그렇다’고 답했다. 지난해 10월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가 교원 1443명을 대상으로 시행한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교원의 93.5%가 ‘글씨를 못 쓰는 학생이 늘었다’고 응답했다.

 손글씨에 익숙지 않은 2030 세대에 악필은 스트레스로 받아들여진다. 대학시험, 취직, 국가고시 등 손글씨로 치르는 과제가 여전히 많기 때문이다. 대학생 박경연(25)씨는 “중간고사 채점을 할 때 혹시 교수님이 못 알아보고 감점처리 할까 봐 신경 써 썼더니 A3 용지 한 장 채우는 데 두 시간이 걸렸다”며 “수정 테이프로 답안지를 뒤덮을 정도로 공들였지만 글씨체에 신경 쓰느라 공부한 내용을 다 담지 못해 결국 낮은 점수를 받았다”고 털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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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로 주관식으로 답안지를 작성해야 하는 고시생들은 악필을 극복하기 위해 각종 ‘고시체’를 연습하기도 한다. ‘짧은 시간에 많은 글자를 쓸 수 있고 오래 써도 손이 아프지 않으며 지적이게 보이는 글씨체’로 유명한 ‘백강 고시체’는 고시생이라면 한 번쯤 시도해 본 글씨체다. 행정고시를 준비 중인 김규호(24)씨는 “신림동 고시촌 헌책방에 글씨 교정책이 굉장히 많다”며 “1점이라도 더 맞아야 하는 상황에서 글씨는 첫인상만큼 중요하다”고 말했다.

 심지어 글씨체는 연애에도 영향을 미친다. 학원 강사 장윤희(27)씨는 “남자친구에게 생일 축하카드를 써줬는데 성의가 없다고 핀잔을 들었다”며 “이후 ‘글씨는 곧 인성’이라며 계속 글씨체를 지적하는 바람에 오랫동안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직장인 장용진(32)씨도 “군 복무 당시 여자친구에게 심혈을 기울여 쓴 편지를 보냈는데 주소를 알아볼 수 없어 우편물이 반송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최근 글씨 교정 전문 학원엔 20~30대 수강생으로 북적인다. ‘글씨 완성’ 코스를 등록하면 약 50여 종의 글씨체 중 원하는 글씨를 골라 배울 수 있다. 하지만 명필이 되는 길은 결코 쉽지 않다. 첫 한 달은 펜을 바르게 쥐는 법과 올바른 자세 등을 연습한다. 펜을 제대로 쥐지 않으면 일시적으로 글씨체가 개선되더라도 다시 원래 글씨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이후엔 자음·모음 쓰기만 두 달 가까이 반복한다. 글씨체 완성까지 걸리는 시간은 평균 열 달이다. 글씨교정전문학원 참바른글씨의 유성훈 원장은 “글씨를 제법 잘 쓰던 사람도 몇 년 안 쓰면 감을 잃는다”며 “최근에는 중·고등학교 졸업 후 오랫동안 손글씨를 안 쓴 20~30대가 많이 찾는다”고 말했다.

 ‘천재는 악필’이란 속설처럼 악필을 개의치 않는 2030 세대도 많다. 특히 IT·디자인 등 컴퓨터나 전자기기를 많이 사용하는 직종에선 글씨 교정의 필요성이 크지 않다. 컴퓨터 글꼴을 디자인하는 타이포디자이너 손지희(30)씨는 “컴퓨터 글꼴도 과학적·미학적 요소가 중요하다”며 “손글씨체보다 컴퓨터 글꼴이 더 중요한 시대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엔 ‘손으로 그린 그림문자’라는 뜻의 캘리그래피(Calligraphy)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캘리그래피는 붓을 사용하는 서예기법을 활용해 아름답고 독특하게 표현한 글씨체를 말한다. 책으로 캘리그래피를 독학하는 박문정(31)씨는 "자음과 모음의 균형이 중요하다”며 "주변에 글씨 선물하는 재미에 빠졌다”고 말했다.

정강현 청춘리포트팀장
김선미·공다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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