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정부는 슬픔 감당 못하고
시민은 자기슬픔만 외치고
정치는 정파적 슬픔만 이용
세월호 세월로 돌려보내야
지난주 금요일 밤.
경남 양산 통도사 객실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곳은 ‘인테리어 제로공간’. 객실은 수식어가 없었다. 장판과 벽지가 전부였다. 조간신문·TV·라디오도 없다. ‘뉴스 제로공간’. 세상 돌아가는 소리는 들리지 않고 맘 돌아가는 소리만 들렸다.
오후 5시30분 공양간으로 갔다. 몇 가지 나물과 고춧가루 없는 콩나물국으로 저녁 공양을 했다. 발우공양 법도에 따라 그릇에 묻은 밥 알갱이 하나까지 숭늉으로 씻어 먹었다.
12시간 이상 자유의 시간이 주어졌다. 바쁜 일상에는 고즈넉한 공간이 되레 ‘위협’이었다. 산사는 금세 어둠으로 곤두박질쳤다. 가랑잎처럼 굴러다니던 관광객도 사라졌다.
조용함이 더 깊어져 ‘고요함’으로 변주되고 있었다. 고요함이 그렁그렁 한 뼘 더 깊어져 일순 적막(寂寞)이었다. 너무 조용해 별 반짝이는 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후발 산벚꽃이 ‘풍등(風燈)’처럼 떠다녔다.
객실 앞 툇마루에 좌정했다. 적막이 들려주는 법문을 잠시 엿들었다.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없지.’
‘축복’같으면서도 일견 ‘저주’같았다. 갑자기 ‘등의 안부’가 궁금했다. 우린 얼마나 ‘앞쪽’만 챙겨왔던가. ‘앞의 문화’에만 최면 걸렸던가. 얼굴은 갑이었고 등은 을이었다. 얼굴은 잘난 자식이고 등은 못난 부모였다. 종일 얼굴만의 시간이었다.
잠을 청한다.
얼굴은 그제야 눈을 감는다. 머슴처럼 방치돼 있었던 등이 비로소 활동을 개시한다. 앞가슴과 얼굴이 편히 잘 수 있도록, 부모 맘으로 밤새도록 불침번을 선다.
별의 세상에도 진보와 보수가 있을까. 물론 없겠지. 진보와 보수로 별을 분류하는 사람만 존재하겠지. 계곡물도 좌파와 우파로 양분돼 흘러갈까. 속상하다고 봄이 와도 싹을 틔우지 않는 나무가 있을까. NO!
‘누구’만 챙긴다면 그게 자연일까.
자연은 모두겠지만 인간은 늘 ‘누구’만을 위한다. 말로는 ‘모두를 위한다’고 외친다. 하지만 그 외침은 거의 고정관념의 산물. 결국 자기 소리뿐.
오전 3시.
새벽예불이 시작됐다. 장엄한 염불소리는 계곡물 소리와 잘 상응했다. 만약 저 염불 소리가 누구만의 해탈을 기원한다면 모르긴 해도 저 산사도 한갓 산중 리조트·펜션에 불과할 것이다. 자연은 아직 아군과 적군이 없다.
통도사를 찾은 날은 세월호 참사 1주기.
흑청빛 하늘이 진도 팽목항 인근 맹골수로 해역의 밤바다 같았다. 뭇별이 희생자의 혼백으로 보여 잠시 고개를 숙였다. 실종된 9개 별도 저기에 있을까.
원대복귀를 했다. 산사는 끄고 뉴스를 켰다.
세월호 1주기 시위 현장에서 태극기가 불태워진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는 서둘러 평양으로 몽진을 떠난다. 절망한 백성에 의해 궁궐이 불태워진다. 저 두 불이 묘한 울림을 준다.
KBS1 주말 대하사극 ‘징비록’ 속 서애 류성룡의 한 대사에 밑줄을 긋는다.
‘나라에 변고가 생겼는데 책임지는 이가 없다면 이 나라는 허깨비가 됩니다. 장차 후학들이 뭘 배우고 뭐가 되겠습니까.’
의병·독립군이 누구를 위해 궐기했겠는가. 나라님보다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멸사봉공한 것 아니겠는가. 세력이 아니라 세상이 지켜주는 임금은 슬픔과 책임이 뭔가를 안다.
세월호가 ‘슬픔 그 자체’라면 세월호보다 더 큰 슬픔이 있다. 모두를 향한 슬픔은 없고 오직 이념·정파·이해타산 등에 편승한 ‘나만의 슬픔’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천재(天災)는 자연의 몫이라 슬픔이 아니다. 인재(人災)의 결정판인 세월호. 현 정부는 이 슬픔이 빨리 지나가기만 바란다. 슬픔 앞에서 몽진만 생각하는 ‘제2의 선조’ 같다.
세월호는 누구만의 ‘세력호’가 아니다. ‘세력’ 속에 갇힌 세월호를 속히 ‘세월’ 곁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이춘호 주말섹션부 차장
'좋은 기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분수대] 각자 위치로 (0) | 2015.04.27 |
---|---|
이훈범의 생각지도] 또 다른 이완구를 막는 델포이 신탁 (0) | 2015.04.27 |
박재일 칼럼] 성완종 사태와 한국정치 (0) | 2015.04.22 |
시선 2035] 세월호 한 여고생의 짝사랑 그 첫사랑에 가슴이 아렸다 (0) | 2015.04.17 |
지구촌 전쟁은 유일신 종교들이 문제다 (0) | 2015.04.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