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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한껏 자유롭게 풀어놓는 말의 놀이터서 잘 놀았다”

구름뜰 2015. 4. 27. 08:24

등단 50주년 맞아 열번째 시집과 산문집 낸 정현종 시인
《 “감회랄 게 따로 있을까요. 시란 말을 한껏 자유롭게 풀어놓는 말의 놀이터예요. 그 공간에서 잘 놀았습니다. 전 물량에 대한 집착이 없으니까 더 잘 논 거 같아요. 세월 참 빨리 갔어요.” 등단 50주년의 감회를 물었더니 그저 활짝 웃으며 잘 놀았단다. 문학이 “온몸에 스며들어 몸을 빵빵하게 부풀렸”던 사춘기 소년은 어느새 백발이 성성한 시인이 됐지만 그 웃음만은 천진했다. 》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의 정현종 시인이 등단 50주년을 맞아 열 번째 시집 ‘그림자에 불타다’와 산문집 ‘두터운 삶을 향하여’를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했다. 올해 우리 나이로 희수(喜壽·77세)를 맞았다. 24일 오후 서울 종로구 경복궁역 인근 음식점에서 그를 만났다. 그의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시절 제자들이 마련한 축하 자리였다.

 

 

 

24일 서울 지하철 경복궁역 인근에서 만난 정현종 시인. 시집 ‘이뻐 보이려고’에서 그는 “이뻐 보이려고 나는/썩은 연두색 바지에다/진회색 재킷을 입었다.”고 썼다. ‘이뻐 보이려고 오늘 무얼 했나’라고 물었더니 “이뻐 보이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같다. 오늘은 옷을 깨끗하게 입고 나왔다”며 웃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표제시 ‘그림자에 불타다’엔 정 시인의 깨달음이 담겨 있다. 그는 몇 해 전 터키 카파도키아에 갔다. 버스를 타고 가는데 넓게 펼쳐진 밀밭이 군데군데 검게 그을려 있었다. 그런데 유심히 살펴보니 구름의 그림자였다. ‘욕망-구름 그림자/마음-구름 그림자/몸-구름 그림자에/일생은 그을려,/너-구름 그림자/나-구름 그림자/그-구름 그림자에/세계는 검게 그을려―//그 모든 너울을 걷어낸 뒤의/구름 자체를 나는 좋아하고/그리고/은유로서의 그림자에 불타는 바이오나―//’

우리가 그림자라 부를 수 있는 것은 헛것, 실체가 아닌 것, 나아가 무(無)입니다. 그림자를 붙들고 씨름하는 것이 일생이 아닌가 했어요. 우리는 일생 동안 너, 욕망, 마음, 시에 그을리며 사는 것이죠.”

시집엔 반백 년 시를 지어온 시인의 시론도 담겨 있다. 시 ‘인사’에선 ‘실은/시가/세상일들과/사물과/마음들에/인사를 건네는 것이라면/모든 시는 인사이다’라고 썼다. 시집에 실린 산문 ‘세상의 영예로운 것에로의 변용’에선 ‘시 쓰기는 사랑의 실천입니다’라며 ‘궁극적인 가치도 만물의 원활한 순환에 조금이라도 기여하는 것일 터입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 있는 시인 행세하는 사람들에게 ‘그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가짜 시인이니라’(‘한 비전’)라고 일침을 놓는다.

“전 자신에게 집착하고, 자기 과시하는 작품을 아주 싫어합니다. 시는 아상(我相), 아집(我執)과는 완전히 다른 길을 갑니다. (시인은 팔을 양옆으로 벌리더니) 시는 이렇게 타자를 향해 마음이 퍼져 나가야 합니다. 그런 게 시예요.”

정 시인은 인터뷰를 유머로 마무리했다. 그가 들려준 시 ‘풍탁’에선 바람 불면 맑은 소리를 내는 풍탁(風鐸)이 있어 ‘내가 가까이 가니 세상없는/맑은 소리를 내는 것이었습니다./필경 내 맑은 바람기 때문인 듯하였습니다’라고 노래한다. 시인의 연세를 생각해 “바람기가 정녕 그 바람기냐”고 물었더니 “척하면 척해야지”라며 놀린다.

 

‘두터운 삶을 향하여’는 26년 만에 묶은 산문집으로 1987년부터 최근까지 쓴 에세이, 강연록, 발표문 등을 담았다. 2006년 11월부터 4개월간 동아일보에 연재한 ‘정현종 시인의 그림 읽기’도 수록했다.

이날 축하 자리에는 정 시인의 연세대 재직 시절 제자인 나희덕 시인, 유성호 한양대 교수 등과 ‘정현종 평론’으로 소천비평상을 수상한 최동호 경남대 석좌교수 등 20여 명이 참석했다. 나 시인은 “잔디밭이 보이면 ‘하아’라고 감탄하며 제일 먼저 발 벗고 달려가는 분이 선생님이었다”며 “온몸으로 자연을 향해 자신을 침투시키고, 시인의 무구함, 자유로움을 몸소 보여준 분”이라고 했다.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