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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터면 저들을 미워할 뻔 했습니다

구름뜰 2015. 10. 8. 09:47

 

 

이규리 시인
관광객 태우고 도시 도는
미국 세인트루이스의 말
발굽 다 닳고 관절엔 소리
인간 우월이 고통 안겨줘
대책도 없이 분노만 생겨…


지난 여름 미국 세인트루이스에 들렀을 때 시가지에서 관광객을 실어 나르는 말을 보았다. 잔등에 꽃장식을 한 말들이 관광객을 태우고 아스팔트 거리를 따각따각 가고 있었다. 훈련된 말들은 이미 길을 외고 있었으리라. 무표정하게 가고 있는 말들의 말굽소리가 귀에 울려 걸음을 옮기기 어려웠다. 관광용 말을 처음 본 건 아니지만 메리어트호텔 앞 매끈한 도시와 뒷머리에 꽃장식한 말들의 대비가 꽃상여처럼 눈물겨웠다. 말들이 아스팔트에 길들여지자면 관절이 다 나가고 발굽이 다 닳는다는 얘기를 들은 터여서 갑자기 내 관절에서 ‘뚜둑’ 소리가 나는 듯 했다.

인도 여행에서 타지마할을 보았을 때도 대리석의 아름다운 궁전보다 궁전의 공사로 죽어간 수백 명의 인부가 먼저 떠올라 즐거움이 흐려졌고, 관광객의 릭샤를 끄는 소년의 까만 맨발을 보았을 때도 관광이 무의미할 만큼 삶이 쓸쓸했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물으며 길 한쪽에 비껴 앉았을 때 한 떼의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때 묻은 손을 내밀었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채 황망히 도망쳐 온 내 모습은 소년의 발뒤꿈치보다 더 까만 때가 묻어 있었으리라.

아무것도 구하지 못하고 아무 힘도 되지 못하는 슬픔이 과연 아름다움일까 자문하는 밤은 고통스럽다. 나보다 약한 자들 앞에서 으스댄 부끄러움과 함께 오래 기억의 매를 맞는 마음이었다. 시가 무력한 건 그런 경우이다. 산업화와 정보화 사회, 눈부신 과학의 발전에 비껴 서서 초라한 자리에 겨우 존재하는 문학을 논할 때도 이토록 암울하지는 않았다. 번히 보면서 아무 행위도 하지 못한 비겁과 무책임, 그리고 인간의 오만을 확인할 때 숨어들고 싶었다. 그러나 그뿐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TV에서 자주 접하는 후원비를 원하는 광고 방송을 볼 때, 그 불행과 벗어날 길 없는 가난을 볼 때면 누군가에게로 향하는 분노를 참기 어려웠다. ARS번호를 누르며 그 상황을 누그러뜨려 보지만 찌꺼기처럼 남는 불편함은 쉬 지워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 본 세인트루이스 시내의 말발굽소리가 잠자던 고통을 일깨워 주었다. 말은 우리가 미시시피강의 ‘세인트루이스 아치’의 감탄할 구조물을 다 보고 돌아오는 늦은 시간에도 따각따각 노선을 돌고 있었다.

돌아온 숙소에서 내 발뒤꿈치가 가렵더니 이윽고 딱딱해지고 있었다. 마룻바닥을 걸을 때 따각따각 소리가 나기도, 어느덧 말발굽소리를 내고 있었는데, 지나친 마음이 신체 일부에 전이된 것일까. 인간이 우월한 위치를 점하고도 그 대가를 대상에의 고통으로 환원할 때 참을 수 없이 화가 나고 원망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방법이나 대책, 그리고 실천 없는 분노는 거짓 공명심일 수도 있다.

살아있는 존재는 어떤 방식으로든 피해갈 수 없는 원죄가 있듯이 아무렇지 않게 걷어버리는 거미줄에 갇힌 거미가 있겠고, 제 발 아래 깔려 있는 개미를 알지 못할 뿐이라고 한다. 막연히 뭔가를 원망하는 일조차도 과민한 편견은 아닐까. 이시영 시인의 시 ‘친견’ 전문을 옮겨보는 일로 자신의 마음 챙김의 방편으로 삼고자 한다.

“달라이 라마께서 인도의 다람살라에서 중국의 한 감옥에서 풀려난 티베트 승려를 친견했을 때의 일이라고 한다.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심했느냐는 물음에 승려가 잔잔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고 한다. ‘하마터면 저들을 미워할 뻔했습니다그려!’ 그러곤 무릎 위에 올려놓은 승려의 두 손이 가만히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