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마저 늘어지는 듯한 도심 낮 거리에 ‘홀로 깨어 앉은 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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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덕동 관음사. 대문에서 정면으로 본당이 마주 보고 있으며 대문 양측에 거대한 히말라야시더가 치솟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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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사 화단에는 일본에서 어린아이들의 수호신으로 여기는 지장보살상과 꼭 닮은 석조물과 몇 개의 돌확이 놓여 있다. |
이 거리는 이른 저녁부터 푸른 새벽까지 깨어있다. 그리고 먼 동이 트고 태양이 정수리를 지나는 동안 잠에 든다. 삼덕소방서 맞은편에서부터 경북대학교 병원까지 일직선으로 뻗어 있는 150m 남짓한 공평로8길. 한때는 음악카페 거리, 문화의 거리라 불리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오래된 깃발 같은 이름이 있다. 삼덕동 관음사(觀音寺) 골목이다.
◆ 도심에 자리한 일본식 사찰, 관음사
문 걸어 잠근 가겟집 사이에 붉은 벽돌로 쌓아올린 높은 담장이 있다. 담장 너머로 짙푸른 히말라야시더 두 그루가 치솟아 있다. 무딘 바늘 같은 이파리들 사이로 직선의 용마루를 가진 팔작지붕이 언뜻 보인다. 은빛의 스테인리스 대문이 활짝 열려 있다. 깊숙한 곳에서부터 아주머니들의 말소리가 경쾌한 장단으로 새어나온다. 달콤한 나른함과 고단한 숙면으로 가득 차 있는 거리에서 저 혼자 깨어 앉은 이, 절집 관음사다.
대문에서 정면으로 본당의 입구와 마주한다. 본당은 정면 3칸, 측면 7칸으로 팔작지붕의 박공부가 정면이다. 용마루와 처마는 직선이며, 박공 단부의 삼각형 모서리는 현어(懸魚)로 장식되어 있다. 서까래는 수평으로 배치되어 있고, 단청은 하지 않았다. 어간의 문은 미서기문이며 문 위에는 구름과 같은 문양이 얕게 새겨진 보가 놓여 있다. 건물은 목조가구로 사각형의 가느다란 기둥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의 전통 절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관음사는 일제시대에 일본인이 지은 일본식 사찰이다.
1916년 일본인 승려가 창건
대구읍성의 돌로 초석 놓아
1968년 동화사 원명스님이
폐허가 된 절 주지로 오면서
관음사로 이름 바꿔
새로 짓자는 의견 많았지만
멀쩡한 건물을 부수고
신도에게 시주금 내라 할수 있느냐며
그대로 둬
무료급식소 ‘불자의 집’운영
노숙자·홀몸 어르신 식사 챙겨
일제 강점기 초, 이 일대는 대부분이 논밭인 대구 읍성의 동쪽 외곽이었다. 일제는 논밭을 갈아엎어 신작로를 내고 법원, 형무소, 세무감독국 등의 행정 기관을 세웠다. 도청, 우체국, 검찰청, 전매청 관사와 거상의 저택도 들어섰다. 관음사는 그들을 위해 지어진 절집으로 원래 이름은 선림사라 전한다. 기록에는 1916년경 일본인 승려에 의해 창건되었고 1919년 동양척식회사의 상무이사가 희사했다고 전한다.
본당의 초석은 해체되어 흩어진 우리 읍성의 돌이라 한다. 반듯한 장방형의 돌들은 완전히 숨겨지지 않은 채 드러나 있다. 마당 곳곳에서도 읍성의 것으로 여겨지는 돌들이 보인다. 본당의 현판은 ‘무설전’이다. 그 앞에 일본식 석등 하나가 서있다. 옥개석의 끝이 고사리처럼 말려있는 ‘카스가 석등’이다. 그 곁에 있던 향나무는 근래에 베어낸 모양이다.
사각의 작은 화단을 사이에 두고 본당과 나란히 고리가 자리한다. 현재 종무소 건물로 쓰이는 고리는 원래 부엌의 기능을 겸하는 승려의 거주 장소였다. 본당과 같은 시기에 지어진 고리는 원래 여러 개의 다다미방을 복도가 둘러싸고 있는 구조였지만 이후 복도 앞으로 방을 덧붙여 내고 다다미도 철거해 예전 형태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화단에는 몇 개의 석조물과 돌확이 놓여 있다. 비가 내리면 본당 지붕을 타고 내린 빗물이 돌확에 고일 것이다. 가만히 바라보면 빗방울 소리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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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사의 요사채와 화단. 오른쪽 건물이 본당과 같은 시기에 건축된 고리 건물이다. |
광복 후 적산으로 분류된 절집은 여성 신도 6명에게 불하되어 이어졌고 고리의 오른쪽 부지는 말일성도교회의 부지로 넘어간다. 1948년 ‘경북도 소재 전 일본불교 사원과 교회에 대한 조사’를 보면 일본의 신사나 불교사원이 자리하고 있던 곳에 교회, 신학교 등과 같은 기독교 관련 시설이 들어서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곳은 그나마 절집으로서의 기능을 근근이 이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6·25전쟁이 터지면서 절집은 경찰의 주둔지가 되었고, 그들이 떠난 후의 절집은 거의 폐허였다 한다.
1968년 신도들의 청으로 동화사의 원명스님이 주지로 오면서 이 절집은 ‘관음사’가 된다. 스님이 처음 왔을 때 관음사는 ‘연탄이 탄 것 한 장, 덜 탄 것 한 장, 안 탄 것 한 장’이 전부였다고 한다. 재건의 시간이 10여년, 그로부터 다시 20년이 훌쩍 넘은 지금 관음사는 많은 부분이 변해 있다. 요사채가 증축되었고 본당의 창호와 고리의 구조도 바뀌었다. 부처님을 모신 내진과 절을 올리는 외진으로 구분되는 본당의 일본식 공간구조는 그대로지만 바닥의 다다미는 장판으로 교체되었다. 붉은 벽돌 담장은 80년대 말 소방도로 공사로 1.2m 정도 후퇴해 다시 쌓은 것이라 한다. 원래의 철근콘크리트 담장이 관음사의 서쪽 벽으로 남아있다. 늙은 나무 전주가 옛 담장의 모서리에 서 있다. 건물을 허물고 새로 짓자는 의견도 많았다 한다. 원명스님은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누가 지었든 어떻게 멀쩡한 건물을 부수고 또 신도들에게 시주금을 내라고 할 수 있느냐.”
◆ 삼덕동 관음사 ‘불자의 집’
말일성도회의 교회가 있던 부지에는 이후 서점이 들어섰다가 식당이 되었는데, IMF 외환위기때 관음사 소유가 되었다. 지금 그곳에는 관음사가 운영하는 무료급식소 ‘불자의 집’이 있다. 150여명의 봉사자들이 매주 목·금·토요일마다 하루 200여명의 노숙자와 지역의 홀몸 어르신을 위해 활동한다. 불자의 집은 관계기관의 도움 없이 자체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매년 바자회를 열어 수익금 전액을 무료급식을 위해 쓴다.
일제 강점기 동안 세워진 일본사찰은 1915년에 시행된 ‘신사사원규칙’에 따라 본당과 고리는 각각 25평 이상, 부지는 300평 이상 갖추어야 했다. 건물 외에 충분한 공지를 확보하게 한 것이다. 그것은 각종 식민정책에 부응하는 활동을 위한 것이었다. 지금 그 땅에 불자의 집이 있다. 삼덕동의 삼덕(三德)이란 모든 번뇌를 소멸한 단덕(斷德),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를 보는 지덕(智德),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은혜를 베푸는 은덕(恩德)을 뜻한다. 관음은 자비를 덕으로 하는 보살님이다. 현재의 관음사는 삼덕을 통해 삶과 함께 현재로 이어져 온 것이다. 광복 후 남아있던 일본 사찰은 남한에만 120여개. 그중 원형이 남아있는 세 곳 정도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원형의 유지는 삶과 유리되어야 가능하다. 관음사는 현재 조계종 산하 송광사의 말사다.
-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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