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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허물기

구름뜰 2016. 3. 21. 07:30




'노자' 39장에는 '수레를 헤아리면 수레가 없어지니 아름답고 매끈한 옥처럼 되려고 하지 말고 거칠거칠한 돌처럼 되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수레를 헤아리면 수레가 없어진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여기서 수레는 전체를 말하고 수레가 수레를 헤아린다는 것은 그 수레를 조각조각 분해해서 살펴본다는 뜻이다. 즉 수레르 분해해서 각각의 구성물을 살펴서는 결코 수레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수레만 그런 것일까. 그렇지 않다. 모든 존재가 그렇다. 생명도 마찬가지다. 모든 존재는 낱생명이 아니고 온생명이다.


자신이 전체임을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감정이 바로 두려움이다. 왜 우리는 그토록 두려워하는가. 우리 스스로가 자신의 한정된 존재, 분리된 존재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온생명 그 자체다. 우리 자신이 바로 생명의 모든 것임을 깨달으면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오직 부분만이 고통 받을 뿐 전체는 고통 받지 않는다. 고통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경계를 설정하여 나와 나 아닌 것을 분리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의 경계를 설정하는 것은 곧 전선을 구축하여 전쟁을 벌이는 것과 같다. 노자가 말하는 것과 같이 경계를 긋는 일은 '거친 돌을 매끈하고 아름다운 옥으로 다듬는 것'처럼 보인다. 학자들이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대상을 잘게 쪼개어 이를 분류하고 이름을 붙이는 것이 그들이 하는 일의 모든 것이다. 그러나 경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경계를 설정하여 그 경계 안쪽만을 취하고 바깥쪽과 전쟁을 벌이는 일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그런데도 우리 삶의 대부분은 이런 전쟁으로 점철되어 있다.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추구하는 것, 불행을 떠나 행복해지려는 것이 우리 삶이기 때문이다. 캔 윌버는 '무경계'라는 책에서 이런 노력이 성취되기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고통과 불행 없이는 쾌락과 행복도 없기 때문이다.


경계선을 긋는 것이 자아정체성의 핵심이다. 우리가 긋는 가장 일반적인 경계선은 '피부밑 자아(skin-encapsuled ego)'라고 불렀다. 피부경계선은 나의 몸과 마음을 나와 동일시하여 나의 몸과 마음의 밖에 있는 것을 세계라고 부른다. 더 나아가 몸과 마음 사이에 경계선을 그어 몸을 '나의 몸'이라고 하여 나 자신이 아닌 나의 소유인 것으로 구별한다. 그리고 마침내 마음 중에서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을 다시 나의 경계선 밖으로 밀어낸다. 


어린아이가 막 엄마의 배 속에서 나왔을 때는 아이와 엄마 사이에 경계는 없다. 그러나 아이가 배가 고프고 대소변으로 인한 불편한 느낌을 갖게 되면서 아이는 자신과 엄마 사이의 경계를 만들게 된다. 즉 경계는 평화로움과 풍요함이 아니라 불편함과 결핍감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다.


인간이 성장한다는 것은 이런 경계를 점진적으로 없애는 과정과 다름없다. 경계 허물기는 중년기 이후부터 시작된다. 경계선을 허무는 것이, 자신의 범위를 확장하는 것이 진정한 성장이라면 그 궁극적인 지점은 어디일끼. 경계를 하나씩 허물어 모든 경계가 사라진 지점을 유학자들은 물아일체 (物我一體), 혹은 무외지심(無外之心)이라고 불렀다. 나와 세계가 하나가 되고 '나'라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은다는 마음이 바로 무경계이고 또 성인의 경지인 것이다.

-'정재걸 교수'의 오래된 미래 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