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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6시, 어느 길 위에 계십니까

구름뜰 2016. 6. 16. 18:10

              

    


이규리 시인
저녁 6시가 주는 의미 다양
주관의 시간으로 돌아가고
공적업무서 해방되는 시간
이 시간에 듣는 음악은 감동
내면으로 돌아가는 기회로

저녁 6시는 객관의 시간에서 주관의 시간으로 돌아가는 때, 공적인 업무에서 해방되는 이 시각을 나는 통칭 저녁 6시라 한다. 겨울이면 벌써 어두워졌을 테고 여름이면 해가 꽤 남아 있겠지만 평균하여 저녁 6시라 한다. 그 시각이 나는 좋다. 묘하게 허전하고 묘하게 해방감이 있으며 어느 때는 가슴이 조이듯 슬프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대상없는 그리움이 몰아치기도 하는데 이 시각이야말로 음악이 필요한 때이다. 더구나 열심히 일한 당신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사실 우리가 음악을 즐긴다고 하나 음악으로부터 우리를 지켜낸다고 하는 편이 더 적합할지도 모른다.

돌아가는 길에 듣던 음악들, 어느 날은 음악 때문에 더 슬펐는가하면 음악 때문에 살고 싶기도 했다. 그리고 몇 차례의 불화나 절망도 음악으로 지나갈 수 있었다. 삶이 우리에게 주는 위안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말은 수정해야 겠다. 일상이란 것이 대개 긴장과 고통 혹은 견딤의 연속이며 지루한 반복이라 해도 그 틈새에 있어주는 음악처럼, 이런 각별한 아름다움은 결국 인간의 몫으로 돌아오곤 했으므로. 음악이 우리의 전신을 휩싸고 의식의 예민한 감각들을 한 곳으로 데려갈 때는 깊은 곳의 무의식까지 깨어나 바람을 쐬는 기분이다. 정색하고 음반을 올리거나 선택한 곡을 턴온 하는 것도 좋지만 우연히 길 위에서 걸음을 멈추게 하던 음악은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았다.

주말이면 길거리 뮤지션을 심심찮게 만나기도 하는데 지난 주말 저녁, 대구 수성못 주변을 걷다가 간이콘서트 장에서 흘러나오던 오카리나 연주는 매력적이었다. ‘엘 콘도르 파사’라는 익숙한 곡조지만 때마침 불어오는 저녁 바람과 못물의 일렁임 사이에서 물결소리 나는 오카리나는 선연하여 무더웠던 하루를 말갛게 씻어주었다. 복잡한 산책길을 일순 환하게 만들고 있었다. 우연히 듣는 노래의 아름다움은 예기치 않음으로 인해 그 기분이 배가되는데 육체의 혼곤함이 덧댄 여행 중에 만난 음악들도 하나같이 절실함을 더하곤 했다. 마드리드의 알람브라궁에서 정교한 타일바닥을 걷고 있을 때 구슬처럼 굴러나오던 ‘알람브라궁의 추억’, 그 기타 음은 오래도록 영롱했다.

그리고 8시간이나 이어진 터키에서의 육로여행 중 졸다가 내린 새벽 2시의 휴게소에서 흘러나오던 기막힌 선율의 파두, 아직도 그 제목을 알지 못하지만 미치도록 아리고 허전한 음악이었다. 그 여운 때문에 버스에 오르고 싶은 마음까지 사라졌는데 훗날 나는 그게 환각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리고 제목을 알지 못한 채 맴돌게 될 음악에 대해서도 경외심이 생겼다. 알지 못한다는 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미지는 미지이므로 영원하다는 역설을 믿고 싶은 것이다.

노르웨이의 그리그 생가를 방문했을 때의 경험도 서늘하게 남아있다. 비지트 홀에 들어서는 순간 ‘솔베이지 송’이 실내에 가득 퍼져 나는 어쩔 줄을 몰랐다. 이 기막힌 순간을 어디에 담아야 할까. 창밖으로는 대서양의 물결이 넘실거리고 때마침 해가 지고 있었다. 저녁 6시였던가. 붉은 노을이 죽음처럼 번져 절벽을 비출 때 그 저녁에 들었던 노래는 의식 너머 우리가 표현할 수 없는 다른 슬픔으로 사무치고 있었다. 그리고 지상에서 가장 작고 예쁜 그리그의 집필실을 곡조처럼 한눈에 새겨 넣었다. 그런데 아름다운 순간에 왜 속죄의식은 찾아오는가. 지극한 아름다움 안에서는 죄의 사함을 받는다고 믿고 싶다.

어떤 기억들은 평생을 가기도 할 것이다. 우연히 들었던 길 위에서의 여러 음악이 그러했듯 10여 년 전, 불국사 경내에서 있었던 밤의 연주도 잊을 수 없다. 바람이 영혼을 어루만지듯 부는 초가을, 불국사 계단 밑 광장에 조명을 두르고 신시사이저 음에 맞춰 대금을 불던 김영동의 연주는 소나무와 달빛과 바람이 이룬 조화였다. 그렇게 음악 역시 자연의 조화에 빚지고 있었다. 푸르스름한 대금소리가 흐르던 경내의 시간은 꿈의 공간이었고 그 장면은 천상의 순간인 양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또 한 번 지워지고 있었다.

아름다움은 비례와 조화에서 오고 지극함은 말이 필요 없는 지점일 것이다. 저녁 6시, 집이 좀 멀어도 좋겠다.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음악으로 우리가 조금 달라질 수 있다면 그리고 다시 내면의 몫으로 되돌릴 수 있다면 저녁 6시, 더구나 내면이 감당하는 아주 겸허한 이 시간 나는 오래 길 위에 있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