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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아주 느리게

구름뜰 2017. 7. 15. 20:16


 



 느리게 아주 느리게



어느 것을 잊고 싶어?

언제까지나 잊고 싶지 않은 것

-지드



반쯤 짓뭉개진 몸을 끌며


인도 한가운데까지 기어온 지렁이가


다시 돌아가기엔 멀고

나아가기도 아득한

바로 그 곳에서


사라졌다


흐,

다행이라는 생각


누구나 보고 싶지 않은 건

보지 않을 수 없는 제 허무일 것이다


이유가 길면 우리는 더 비참해진다는 걸 알아


네가 사라졌던 그 여름 쪽을 향해

내가 안도했듯이


그렇다 해도 잊고 싶은 건 결국 잊히지 않는 것이므로


돌아갈 수도 없고 또

나아갈 수도 없는 저

벗은 햇볕 속을


느리게 아주 느리게 기어가고 있는, 지상의 춤같이

-이규리




북어(北魚)


밤의 식표품 가게

케케묵은 먼지 속에

죽어서 하루 더 손때 묻고

터무니 없이 하루 더 기다리는

북어들,

북어들의 일 개 분대가

나란히 꼬쟁이에 꿰어져 있었다.

나는 죽음이 궤뚫은 대가리를 말한 셈이다.

한 쾌의 혀가

자갈처럼 죄다 딱딱했다

나는 말의 변비증을 앓는 사람들과

무덤 속의 벙어리를 말한 셈이다.

말라붙고 짜부라진 눈,

북어들의 빳빳한 지느러미.

막대기 같은 생각

빛나지 않은 막대기 같은 사람들이

가슴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달고

헤엄쳐 갈 데 없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느닷없이

북어들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귀가 먹먹하도록 부르짓고 있었다.

-최승호




그해 겨울


노랗고 분홍으로 생기롭던 장미가 

시들고 말라갈수록 색을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함께 있다고 닮을까

메말라가는 게 꽃만의 일은 아닌데  

  

봄날처럼 따뜻했던 겨울도 가고


우리는 지금 닮아가는 지

변해가는 지


향기와 색을 잃어버렸지만

장미가

장미가 아닌건 아니듯


그해 겨울은 따뜻한 날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