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주의라는 괴물에 사로잡힌 한국사회
개인의 가치를 성취와 연결 짓지 말아야
최인철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지난 연말, 졸업한 제자들과의 저녁 한 끼가 지금껏 마음에 걸린다. 일과 가정, 모두를 잡고자 고군분투하는 워킹맘 제자들이었다. 모두 밝고, 똑똑하고, 성숙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세대 차이일까, 남녀 차이일까, 아니면 오랜만에 만난 어색함일까. 그 알 수 없는 불안감의 실체는 저녁 자리가 무르익어갈 즈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너무 완벽했다. 더 정확히는 완벽한 엄마, 완벽한 직장인, 완벽한 아내, 완벽한 딸이 되고자 하는 의지가 불안할 정도로 강했다. 완벽한 엄마가 되어 완벽하게 아이를 키워야 한다는, 그들이 짊어진 부담 앞에서 국가의 저출산 대책이란 것이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를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완벽하게 아이를 키울 수 없을 바에야 처음부터 낳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그들의 생각을 저출산 대책이라는 이름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발상이 얼마나 영혼 없는 것인지.
젊은이들이 ‘완벽’이라는 절벽으로 내몰리고 있다. 과거 젊은이들에 비해 현대 젊은이들의 완벽주의 점수가 걱정스러울 정도로 상승하고 있다는 연구가 최근에 발표됐다. 신자유주의 경향이 강한 나라들에서 이런 추세는 더 뚜렷했다. 외부 개입이 최소화된 상태에서 개인 간 무한 경쟁이 강조되고, 경쟁의 승패가 경제적 부와 사회적 지위로 직결되며, 교육이 배움과 성장보다는 취업과 경제적 성공을 위한 수단으로 간주되는 세상이다 보니, 사회 전체가 온통 ‘경기장’이다. 자식의 실패는 자식뿐 아닌 부모의 실패가 돼버렸다. 그래서 요즘의 젊은 부모는 자신도 완벽해야 할 뿐만 아니라 자녀의 성공까지 완벽하게 이루어내야 하는, 이중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완벽주의에는 좋은 것들이 별로 없다. 완벽주의가 좋은 성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그 정도 손해는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위험한 생각이다. 완벽주의는 우울, 외로움, 자살 충동, 분노 등과 같은 정신적 문제들의 핵심 고리이다.
완벽주의에는 크게 세 가지 얼굴이 있다. 하나는 자신에 대한 완벽주의다. 자신에 대한 지나치게 높은 기대와 그에 따른 엄격한 자기비판이다. 다른 하나는 타인에 대한 완벽주의다. 타인에게 비현실적으로 높은 기대를 부여하고 그에 미치지 못할 경우 혹독한 평가를 내린다. 최근 들어 급상승하고 있는 완벽주의는 제3의 얼굴로서, 사회에 대한 인식과 관련 있다. 자신에게 부과된 완벽에의 기대가 ‘사회 탓’이라는 지각이다. 사회가 자신들에게 지나치게 높은 기준을 요구하고 있으며, 거기에 부모와 학교, 회사가 가세하여 그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할 경우 혹독한 비난을 가한다고 울분을 터트리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런 ‘사회적으로 강요된 완벽주의’가 위험 수위까지 상승했다. 약 20년 동안의 완벽주의 점수 변화를 추적한 연구에 따르면, 사회적으로 강요된 완벽주의가 다른 두 가지 완벽주의보다 상승 폭이 두 배나 높다. 개인의 정신 건강에 미치는 악영향도 다른것들보다 훨씬 크다.
완벽주의가 우리를 파괴시키는 가장 강력한 도구는 스스로에 대한 불만이다. 내가 이룬 것과 가진 것에 대한 불만을 넘어서, ‘나’라는 사람 자체에 대한 실망과 ‘나’라는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인 불안을 유발한다. 좋은 삶의 핵심이 자신에 대한 만족과 자기 정체성에 대한 확신이 아니던가? 개인의 최선의 삶 혹은 ‘좋은(good) 삶’에 필요한 조건들을 만들어내야 할 가정, 학교, 기업, 그리고 국가가 ‘완벽한(perfect ) 삶’이라는 괴물을 살찌우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괴물을 잠재울 것인가? 이 괴물을 제거하는 완벽한 해법을 즉시 만들어야 한다고 기대한다면, 그 역시 완벽주의가 만들어낸 조급증이다. 완벽주의는 이제 특정 개인의 병리적 현상이 아니라, 시대의 아픔이다. 사회 전체적으로 해법을 강구해야 한다. 그러나 그 해법이 무엇이든 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의 ‘가치’를 개인의 ‘성취’와 연결 짓지 않겠다는 정신을 공유하는 것이다. 개인의 가치를 물질의 축적 정도로 재단하지 않겠다는 내적 저항과, 교육이 돈벌이의 수단만이어서는 안 된다는 고집을 요한다. 귀농한 사람을 소개할 때 굳이 ‘억대 연봉’이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겠다는 약속, 서울대에 합격하고도 등록하지 않은 학생의 숫자를 대단한 뉴스인 양 소개하지 않겠다는 상식을 요한다.
미국의 정치이론가 벤자민 바버의 선언처럼 세상을 강자와 약자, 성공과 실패로 나누지 않고, 배우는 자와 배우지 않는 자로 나누겠다는 강력한 자기 선언이 필요할 때다. 그것이 시대의 아픔이 되어버린 완벽주의에 맞서는 길이고, 우리의 젊은이들을 위해 행해야 할 최소한의 의무다.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최인철
「 서울대 행복연구센터 센터장. 서울대 심리학과 졸업, 미시간대학교 사회심리학 박사. 홍진기 창조인상 수상. 저서 『프레임』, 『present』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