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타인과의 관계 속 존재
모방 통해 자신의 존재 확인
추상회화 등장은 모방 탈피 선언
그런 사람들 모인 곳이 바우하우스
“나는 곧 나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다. 불타는 가시나무 덤불에서 신을 만난 늙은 모세는 두려워 떨며 물었다.
“사람들이 하나님이 누구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신은 대답했다. “나는 나다!” 신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를 물어봤는데, 신의 대답이 무척 당황스럽다.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는 거다!
신의 대답은 오히려 인간존재의 본질에 관한 설명이라고 봐야 옳다. 신은 ‘스스로 존재’하지만,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 존재’한다. 인간은 타인의 모방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인간은 나 이외의 또 다른 인간, 혹은 대상을 ‘흉내 내는 존재’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인간은 날 때부터 흉내 내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다. 갓 태어난 아기에게 혀를 내밀거나, 입을 벌리면, 아기도 똑같이 혀를 내밀거나 입을 벌린다.
‘모방’을 심리학적으로 가장 잘 설명한 사람은 스위스의 발달심리학자 장 피아제(Jean Piaget)다. 그는 인간의 인지발달을 ‘모방의 확대과정’으로 설명했다. 눈앞에 일어나는 일들을 그대로 모방하던 아동이 어느 순간부터 이전에 봤던 타인의 행동을 흉내 내기 시작한다. 시간이 흐른 후에 모방한다는 이야기다. 이를 피아제는 ‘지연모방’이라고 개념화했다.
창조성은 아는 것을 다시 ‘편집’하는 능력
‘지연모방’은 아동이 자신의 머릿속 어딘가에 타인의 행동을 저장했다가 적당한 맥락에 다시 꺼낼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아동의 머릿속에 무슨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마치 원시시대 사냥꾼이 자신이 잡은 동물의 숫자를 나무에 칼집을 내어 기억하다가 마침내 숫자라는 ‘기호적 매개(semiotic mediation)’를 통해 내면화하여 기억하듯, 아동에게도 기억과 사고라는 내면화된 인지체계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피아제는 ‘지연모방’이 나타날 때(생후 16개월~18개월)부터 아동의 생각하는 능력, 즉 인지능력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한다고 주장한다.
‘흉내 내는 존재’로서의 인간은 1990년대에 확인된 ‘거울 뉴런(mirror neuron)’의 존재로 더욱 분명해졌다. 인간은 날 때부터 상대방의 정서적 표현을 흉내 내는 거울 뉴런을 갖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물론 원숭이에게서도 단순한 메커니즘의 거울 뉴런이 확인되지만, 인간의 거울 뉴런은 훨씬 복잡하고 다양한 형태로 작동한다. 인간의 소통능력은 타인과 공감할 수 있는 거울 뉴런에 기초한다. ‘같은 느낌을 갖는 능력’으로 인해 ‘의미를 공유하는 능력’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인간이 ‘흉내 내는 존재’라면 새로운 것의 창조는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가. 피아제는 ‘지연모방’으로부터 ‘표상(representation)’이라는 개념을 이끌어낸다. 표상은 ‘다시(re)’와 ‘보여준다(presentation)’는 뜻이다. 피아제가 설명하는 인지능력이란 언젠가 봤던 것을 스스로에게 다시 보여주는 것이다.
피아제의 이론을 창조성과 연결하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창조적 능력이란 자신이 이미 보고, 머릿속에 기록해놓았던 것들을 다시 꺼내, 새롭게 연결하는 편집능력이다. 새롭게 편집하여 ‘표상’하고 그 새로운 편집 결과에 대한 개념, 즉 ‘메타언어’를 발전시키는 것이 창조성의 핵심이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것’은 절대 못 만들어낸다. 모두 ‘이미 존재하는 것들의 새로운 편집’일 뿐이다. 그래서 많이 보고 다녀야 하고, 부지런히 공부해야 한다. ‘지연모방’할 수 있는 재료가 풍부해야 새로운 편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피아제는 새로운 것들의 편집을 통한 창조적 능력의 발현을 ‘놀이’에서 찾는다. 아동발달 초기의 장난감은 죄다 외부세계의 축소모방품이다. 아동은 사람을 똑같이 닮은 인형, 축소된 자동차를 가지고 논다. 모방의 즐거움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대상의 원래 의미, 기능과는 관계없는 놀이를 시작한다.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아가고, 베개를 타고 말처럼 달린다. 새로운 의미와 기능이 편집되기 시작하는 이 과정을 피아제는 ‘상징놀이(Symbolspiel)’라고 정의했다. 레고와 같은 블록 장난감은 상징놀이가 효율적으로 작동하게 하는 훌륭한 발명품이다.
피아제의 발달이론에서 인간의 인지체계(쉐마·Schema)가 외부세계에 맞춰 변하는 과정을 ‘조절(Akkommodation)’이라 하고, 외부세계를 인지체계에 맞춰 재구성하는 것을 ‘동화(Assimilation)’라고 한다. ‘모방’은 ‘조절’을, ‘상징놀이’는 ‘동화’를 대표하는 현상이다. 피아제에게 있어 조절과 동화의 ‘평형(equilibrium)’이 이뤄져야 인간과 환경 사이의 상호작용이 평화롭다.
바우하우스, 새로운 ‘행위’를 하는 곳
피아제의 이론을 창조성과 연결하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창조적 능력이란 자신이 이미 보고, 머릿속에 기록해놓았던 것들을 다시 꺼내, 새롭게 연결하는 편집능력이다. 새롭게 편집하여 ‘표상’하고 그 새로운 편집 결과에 대한 개념, 즉 ‘메타언어’를 발전시키는 것이 창조성의 핵심이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것’은 절대 못 만들어낸다. 모두 ‘이미 존재하는 것들의 새로운 편집’일 뿐이다. 그래서 많이 보고 다녀야 하고, 부지런히 공부해야 한다. ‘지연모방’할 수 있는 재료가 풍부해야 새로운 편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피아제는 새로운 것들의 편집을 통한 창조적 능력의 발현을 ‘놀이’에서 찾는다. 아동발달 초기의 장난감은 죄다 외부세계의 축소모방품이다. 아동은 사람을 똑같이 닮은 인형, 축소된 자동차를 가지고 논다. 모방의 즐거움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대상의 원래 의미, 기능과는 관계없는 놀이를 시작한다.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아가고, 베개를 타고 말처럼 달린다. 새로운 의미와 기능이 편집되기 시작하는 이 과정을 피아제는 ‘상징놀이(Symbolspiel)’라고 정의했다. 레고와 같은 블록 장난감은 상징놀이가 효율적으로 작동하게 하는 훌륭한 발명품이다.
피아제의 발달이론에서 인간의 인지체계(쉐마·Schema)가 외부세계에 맞춰 변하는 과정을 ‘조절(Akkommodation)’이라 하고, 외부세계를 인지체계에 맞춰 재구성하는 것을 ‘동화(Assimilation)’라고 한다. ‘모방’은 ‘조절’을, ‘상징놀이’는 ‘동화’를 대표하는 현상이다. 피아제에게 있어 조절과 동화의 ‘평형(equilibrium)’이 이뤄져야 인간과 환경 사이의 상호작용이 평화롭다.
바우하우스, 새로운 ‘행위’를 하는 곳
외부에 존재하는 세계를 정확히 ‘재현’하던 모방적 회화를 더 이상하지 추구하지 않는 추상회화의 등장은 인간이 ‘모방을 통한 외부세계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신처럼 스스로 존재하겠다는 선언이다. 추상회화의 추구는 ‘조절’과 ‘동화’에 의해 유지되었던 환경과의 균형 잡힌 상호작용을 포기하겠다는 과감한 결단이기도 하다. 신의 영역이었던 ‘창조(creation)’가 ‘창조성(creativity)’이란 단어로 변형되어 인간의 능력을 표현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도 추상회화가 출현했던 바로 그때부터다.
그러나 인간이 모방을 포기하고 신처럼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는 고단하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타자와의 관계를 거부하고 물에 비친 자신과 사랑에 빠지며, 스스로 존재하고자 했던 나르시스는 물에 빠져 죽었다.
‘신은 죽었다’고 외치며, 끊임없는 ‘자기 극복’을 통한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라는 존재방식을 제시했던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도 고통스러웠다. 각종 질병에 시달리다가 결국 정신병으로 발작을 일으켰다. 말년에는 바이마르의 빌라 질버블리크에서 누이의 보살핌을 받으며 10여 년간 고통스러운 삶을 살다가 1900년 사망했다.
묻힐 곳을 찾지 못했던 니체는 목사였던 자신의 아버지가 근무했던 교회 공동묘지에 초라하게 매장됐다. 니체가 신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교회묘지에 매장되는 것을 반대했던 교회 측에는 니체가 ‘목사아들’이었다며 겨우 허가를 얻어냈다. 그런데 독일의 목사아들들의 삶은 매우 흥미롭다. 『저먼 지니어스(German Genius)』를 쓴 피터 왓슨(Peter Watson)은 ‘아버지의 세계’와 투쟁해야 했던 독일의 ‘목사아들들’이 독일사회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고 주장한다(이와 관련한 독일 경건주의와 기능주의의 관계에 대해서는 추후에 자세히 다루겠다).
구약에서 신이 ‘스스로 존재하는 자’였다면, 신약에서의 신은 ‘말씀’이다.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쓰고 있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루터의 번역을 몹시 맘에 안 들어 했다. 고민하다가 ‘로고스(Logos)’를 ‘행위(Tat)’로 바꿔 번역했다. ‘태초에 행위가 있었다!’ 프로이트는 파우스트의 이 번역을 자신의 저서 『토템과 타부』의 마지막에 인용한다. ‘살부(殺父)’의 결과에 대한 아들들의 두려움과 고통으로 생겨난 토템과 타부에 관한 긴 설명 끝에 ‘태초에 행위가 있었다’고 마무리 짓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가 ‘말씀(das Wort)’이었다면, 아들은 그 아버지를 죽이는 ‘행위(die Tat)’를 한다는 거다.
인간은 신처럼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고단하고 고통스러워도 대상을 모방하는 방식으로 퇴행할 수는 없는 일이다. 스스로 존재하려고 했던 추상회화는 결국 ‘생산’이라는 ‘행위’로 옮겨간다. 바로 그 지점에 ‘예술과 기술의 새로운 통합’이라는 바우하우스의 정신이 있는 것이다. 니체가 고통스럽게 숨을 거뒀던 바로 그 장소인 바이마르에 19년 지난 후 바우하우스가 설립된다. 그리고 다양한 방식의 추상회화를 실험하던 고단한 예술가들은 바우하우스 선생이 되었다.
그러나 인간이 모방을 포기하고 신처럼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는 고단하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타자와의 관계를 거부하고 물에 비친 자신과 사랑에 빠지며, 스스로 존재하고자 했던 나르시스는 물에 빠져 죽었다.
‘신은 죽었다’고 외치며, 끊임없는 ‘자기 극복’을 통한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라는 존재방식을 제시했던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도 고통스러웠다. 각종 질병에 시달리다가 결국 정신병으로 발작을 일으켰다. 말년에는 바이마르의 빌라 질버블리크에서 누이의 보살핌을 받으며 10여 년간 고통스러운 삶을 살다가 1900년 사망했다.
묻힐 곳을 찾지 못했던 니체는 목사였던 자신의 아버지가 근무했던 교회 공동묘지에 초라하게 매장됐다. 니체가 신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교회묘지에 매장되는 것을 반대했던 교회 측에는 니체가 ‘목사아들’이었다며 겨우 허가를 얻어냈다. 그런데 독일의 목사아들들의 삶은 매우 흥미롭다. 『저먼 지니어스(German Genius)』를 쓴 피터 왓슨(Peter Watson)은 ‘아버지의 세계’와 투쟁해야 했던 독일의 ‘목사아들들’이 독일사회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고 주장한다(이와 관련한 독일 경건주의와 기능주의의 관계에 대해서는 추후에 자세히 다루겠다).
구약에서 신이 ‘스스로 존재하는 자’였다면, 신약에서의 신은 ‘말씀’이다.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쓰고 있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루터의 번역을 몹시 맘에 안 들어 했다. 고민하다가 ‘로고스(Logos)’를 ‘행위(Tat)’로 바꿔 번역했다. ‘태초에 행위가 있었다!’ 프로이트는 파우스트의 이 번역을 자신의 저서 『토템과 타부』의 마지막에 인용한다. ‘살부(殺父)’의 결과에 대한 아들들의 두려움과 고통으로 생겨난 토템과 타부에 관한 긴 설명 끝에 ‘태초에 행위가 있었다’고 마무리 짓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가 ‘말씀(das Wort)’이었다면, 아들은 그 아버지를 죽이는 ‘행위(die Tat)’를 한다는 거다.
인간은 신처럼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고단하고 고통스러워도 대상을 모방하는 방식으로 퇴행할 수는 없는 일이다. 스스로 존재하려고 했던 추상회화는 결국 ‘생산’이라는 ‘행위’로 옮겨간다. 바로 그 지점에 ‘예술과 기술의 새로운 통합’이라는 바우하우스의 정신이 있는 것이다. 니체가 고통스럽게 숨을 거뒀던 바로 그 장소인 바이마르에 19년 지난 후 바우하우스가 설립된다. 그리고 다양한 방식의 추상회화를 실험하던 고단한 예술가들은 바우하우스 선생이 되었다.
김정운 문화심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