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뽑은 작가의 책

박완서-김연수 [밤은 노래한다]

구름뜰 2009. 3. 25. 23:23

 [신년기획] 작가가 뽑은 작가의 책 ② 박완서 →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 [중앙일보]

소름 돋는 상상력 … 질투한다, 존경한다

대중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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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박완서(78)씨는 1930년대 초 북간도를 배경으로 한 김연수(39)씨의 장편소설 『밤은 노래한다』를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으로 꼽았다. 박씨는 『밤은…』에 대해 “아직도 생존자가 있는 최근세사를 소설화하기 위해 치밀한 취재와 긴 시간, 체력을 투자한 젊은 작가의 패기가 느껴지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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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씨의 『밤은 노래한다』가 1930년대의 동만주를 배경으로 씌어진 소설이라는 걸 알고 처음엔 좀 당혹스러웠다. 마치 내가 맡아놓은 자리를 빼앗긴 것처럼 섭섭하고 억울한 느낌까지 들었다. 누가 시키거나 권한 것도 아닌데 그쪽 이야기는 꼭 내가 써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을 오랫동안 품어왔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왜 그런 생각을 품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아마도 어린 시절부터 사춘기에 걸쳐 나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남부여대(男負女戴), 만주로 떠나는 일가족을 가까이서 볼 기회가 많았다는 것도 있고, 고향마을에 하룻밤 사이에 집을 비우고 감쪽같이 사라진 일가가 있었다는 것하고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기차 타고 만주로 떠나는 가족들은 6·25 때 피난민보다 남루했고, 하룻밤 사이에 비운 집은 단지 빈 집이라는 것 이상의 공포감을 자아냈다. 순사와 빚쟁이들이 남은 세간을 몇 탕 뒤지고 나자 빈집은 버틸 기운을 잃고 휘청거렸고, 아이들은 가까이 가기를 꺼렸다.

무너질까봐 또는 도깨비가 나올 것 같아서 무서운 것하고는 다른, 막연한 외경심을 품었던 것은 어른들이 그들이 떠나간 곳을 간도(間島) 어쩌구, 수군거리면서 짓는 우러름의 표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우러름은 그 빈집에 대한 신비감을 더 했다. 해방이 되자 동네 사람들은 그 집주인의 금의환향을 기다리는 눈치였지만 내 고향이 휴전선 이북 땅이 될 때까지도 나는 그들의 귀향을 보지 못했다.

교포들이 많이 산다는 연길 쪽 가기가 내 고향땅 가기보다 쉬워지게 되자마자 내가 연길을 방문했던 것은 특정한 누군가를 궁금해 하거나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어린 마음에 존경심과 신비감을 자아냈던 분들의 후손들의 지조 높은 삶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 그런 귀한 것이 아무데나 굴러다닐 턱도 없거니와 자본주의에 막 물들기 시작한 그들이 나에게는 뜨악하기만 했다. 그때 동행한 분은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재야 사학자여서 그쪽에 학자들을 소개받기도 했지만 나는 취재하고 싶은 호기심조차 일지 않았다.

나는 김연수라는 작가를 질투하며 한편 존경하며 이 소설을 읽었다. 내가 섣불리 집적거려 놓지 않기를 참 잘했다는 안도감도 숨기지 않겠다. 아직도 생존해 있는 증인도 적지 않을 최근세사를 이만큼 성공적으로 소설화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치밀하고 참을성 있는 취재와 긴 시간과 체력을 투자했을까, 그건 내가 감히 넘볼 수 없는, 패기 있는 젊은 작가만의 특권이다.

더 부러운 건 그의 상상력이다. 나는 상상력은 곧 사랑이란 말을 믿는 사람인데 나에게 부족했던 건 거기서 그 시대를 살다간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러나 내가 이 끔찍한 이야기를 마치 내가 경험한 것처럼 소름 돋는 느낌으로 읽은 것은 아직도 내 안에 생생한 동족상잔의 기억 때문일 것이다. 민족과 국가를 위한다는 명분하에 민족과 국가를 위한다는 저희들끼리 서로 얼마나 못할 노릇을 해왔던가. 그건 우리 근세사의 어둠일 뿐 아니라 우리 자신 속의 어둠이다.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고 빛을 들이댄 작가의 용기에 찬사를 보낸다.

◆『밤은 노래한다』(문학과지성사, 2008년)=김연수(39)씨의 여섯 번째 장편소설. 1930년대 초 북간도의 조선인 사회를 뒤흔들었던 ‘민생단’ 사건을 소재로 삼았다. 조선의 혁명가들이 서로를 일제의 첩자로 몰아 500여 명의 희생자를 낳은 비극적 사건이었다. 자신의 의도와는 관계 없이 사랑 때문에 복잡한 정세와 얽혀버린 한 청년의 고뇌를 그려낸 작품이다.



◆박완서=1931년 경기도 개풍군 출생. 70년 장편소설 『나목』으로 데뷔했다. ‘영원한 현역작가’이자 ‘한국문학의 대모’라 불린다. 대표작으로 『그해 겨울은 따듯했네』 『너무도 쓸쓸한 당신』 『친절한 복희씨』 『마른 꽃』 『그 남자네 집』, 동화집 『자전거도둑』, 수필집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호미』 등이 있다. 황순원문학상·이상문학상·동인문학상·대산문학상·만해문학상·호암상 예술상 등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