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뽑은 작가의 책

김인숙 - 박범신[촐라체]

구름뜰 2009. 5. 5. 09:06

작가가 뽑은 작가의 책 (16) 소설가 김인숙 → 박범신 『촐라체』 [중앙일보]

발밑 얼음 쩡쩡 갈라지는, 삶의 비장함

대중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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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음 속에서 흐르는 물을 봤다. 물이 어찌나 명징하게 흐르는지, 그 물의 느낌을 시리다고 해야 하나, 고요하다고 해야하나, 혹은 고독하다고 해야하나, 말을 찾을 수가 없어서 그냥 들여다보고만 있었다. 그때 왜 『촐라체』(푸른숲)가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같이 그 물을 들여다보던 누군가가 산행 얘기를 꺼냈었던 것도 같다. 크레바스란 것이 있다고. 빙하의 균열을 그렇게 부른다고 했다. 얼음 속의 깊은 갈라짐, 균열이 깊으면 그것을 틈이라고 부를 수도 없겠다. 틈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틈은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박범신 선생이 자주 가신다는 네팔에 나는 가본 적이 없다. 갔다 온 사람들이 그곳 얘기를 할 때면 눈이든 말이든 맑은 느낌이 들었다. 거기 뭔가 대단한 것이 있을 듯했다. 그리고 『촐라체』를 읽었다. 산을 오르지 않으면 안 되는, 오를 수밖에 없는 형제의 이야기다. 소설을 읽는 동안 자꾸 크레바스가 떠올랐다. 삶이 너무 가팔라서, 견뎌야할 상처가 너무 깊어서, 발밑에서 무언가가 자꾸 쩡쩡 갈라지는 듯했다. 삶은 살얼음을 딛고 가는 일이 아니라, 시퍼런 균열을 응시하고 건너가는 일인 걸까. 그래야하는 것일까. 수없이 많은, 가볍고 얄팍한 것들 사이에서, 『촐라체』는 묵중하고 비장하다. 숨을 눌러 쉬며, 소설을 읽었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을, 그들의 삶과 죽음을, 응시하는 시선이 또 있다. 흔들리고 출렁이는 것들 사이에서, 시선은 모든 것을 견디는 기다림이다.

박범신 선생의 소설을 고등학교 때 처음 보았었다. 교과서 사이에 두고 선생의 책을 읽던 그 시절이 이제는 아주 오래 전의 얘기가 돼버렸다. 그 긴 세월을 지나 나도 나이 들어 뵙게 되는 선생의 얼굴이, 세상에, 여전히 청년이시다. 삶을 가볍게 딛지 않고, 균열을 만만하게 견디지 않았을 노장의 오늘이 그 얼굴에 있다. 『촐라체』는, 그래도 끝내는 살아서 산을 내려오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야기는 모두 산에 묻혀있다. 시리고, 고요하고, 혹은 고독하게. 선생의 시선을 쫓아, 다음의 이야기를 기다린다.

◆김인숙=196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8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상실의 계절’로 등단, 소설집 『함께 걷는 길』『칼날과 사랑』『브라스밴드를 기다리며』, 장편소설 『핏줄』 『불꽃』 『긴 밤, 짧게 다가온 아침』 『먼 길』 등을 펴냈다. 탄탄한 문장, 섬세한 심리묘사 등을 통해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을 민감하게 다뤄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