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언씨의 원고는 18일 밤 10시21분에 e-메일로 들어왔다. 다음날 새벽 4시46분 추가 e-메일이 왔다. 단어 두 개를 고쳐달라는 내용이었다. 단어 하나 붙들고 밤새 고민했던 게다. [김병언 제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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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도 그다지 하지 않는 회사원으로 줄곧 지내다가 마흔이 돼서야 비로소 소설을 쓰겠다고 작심을 하던 나는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라는 소설집을 통해 윤후명 선생을 다시 만났다. 바로 그 무렵에 발간된 책이었다. 내가 ‘다시 만났다’는 건 소싯적의 기억 때문이다. 내가 지방에서 중학교에 다닐 때, 서울의 어떤 고등학생이 ‘학원’ 잡지의 현상문예에서 시와 소설 양쪽에 이름을 올린 걸 보고 입이 딱 벌어진 적이 있었다. 그래서 윤상규라는 이름이 절로 나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그 후 십여 년이 지난 어느 해 연초에 집에서 구독하던 신문에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이 실렸는데 당선자의 본명이 바로 윤상규였다. 나는 ‘아하, 이 사람이 예전의 그 사람이군’하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 후론 중동의 공사장에서만 4년을 지내는 둥, 도통 소설과는 거리가 멀었던 나는 그 이름을 거의 잊고 지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책은 내가 장기간 집을 떠날 때면 가방 속에 눌러 담곤 하는, 절대로 바뀌지 않는 세 권의 책들 중 하나가 되었다.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나는 윤후명 선생의 소설이 너무나 흥미진진하다. 어디까지가 픽션이고 어디까지가 논픽션인지 헷갈리게끔 으레 윤 선생 본인과 꼭 닮은 ‘나’가 등장해 갈팡질팡 미몽(迷夢) 속을 헤매는 광경들이 나로 하여금 때론 눈물겹게 때론 오싹하리만치 삶의 페이소스를 절감하게 하기 때문이다.
가장 최근에 발간된 소설집 『새의 말을 듣다』에서도 선생은 여전히 나를 강렬히 사로잡았다. 또한 군데군데 박혀 있는 감성 짙은 문장들은 선생이 예사롭지 않은 시인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준다. 단편 ‘서울, 촛불 랩소디’에서 내 눈길을 잠시 머물게 한 “부다페스트는 내가 갔던 곳이 아니라 우주의 어떤 공간에 숨어 있는 곳이었다. 숨어 있다기보다 떠도는 곳이었다”와 같은. 그리고 『새의 말을 듣다』에 실린 10편의 소설 제목들도 아마도 내겐 그리운 이름들이 될 게 틀림없다.
◆새의 말을 듣다(문학과지성사, 2007)=중견 작가 윤후명(63)이 등단 40년 되던 해 묶어낸 소설집. 모두 10편의 작품이 담겼다. 독도행 배를 타고 가거나(‘새의 말을 듣다’), 부다페스트행 열차에 몸을 싣고(‘서울, 촛불 랩소디’), 미니버스를 타고 티베트의 낭떠러지를 오르는(‘구름의 향기’) 등 주인공들은 길 위에서 자신의 삶을 반추한다.
◆김병언=1951년 대구 출생. 서울대 언어학과를 졸업하고 호텔, 건설회사 등에서 일했다. 1992년 ‘문학과 사회’에 단편 ‘이삭줍기’를 발표하며 늦깎이 등단했다. 소설집 『개를 소재로 한 세 가지 슬픈 사건』 『천지의 사랑』 『남태평양』, 장편 『목수의 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