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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람을 사랑했네

구름뜰 2010. 2. 24. 22:04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ZOOM IN] 안도현 시인
 
계간시인세계
안도현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준엄하게 묻는 시인

안도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있다. 회장은 없다. 모두가 회장이다. 전국적으로 수백만 이상이다. 매일 밤, 부엉이조차 둥지 문을 닫을 시각이면 회의가 열린다. 소리도 없다. 달은 보이지 않는다. 바람은 소슬하고, 공기는 차다. 안도현은 임재한다. 말을 크게 하지는 않지만 주장은 분명하다. 그는 문학의 드라큘라다. 회원들의 목을 딴다. 피를 먹지는 않고 대신 정체불명의 액체를 주입한다.

그때부터 모두가 안도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자칭 회장이다. 전염은 빠르다. ‘안도현 사교’의 좀비가 된 그들은 불쌍하다. 본인들은 무지무지 행복하다. 푸른색을 띤 정체불명의 액체는 그만큼 효과가 강력하다. 모두가 앞사람의 어깨를 붙잡고 강시처럼 스카이콩콩을 하며 이곳저곳을 뛰어다닌다. 그들은 기꺼이 안도현 사당에 모여서 자신의 인생을 신탁한다. 안도현의 모든 시 문장들은 정언 명령으로 돼 있다. 그것의 외형적인 문장 형식이 질문이든 영탄이든 관계 없다.

가령 보라. “여름이 뜨거워서 매미가/ 우는 것이 아니라 매미가 울어서/ 여름은 뜨거운 것이다” 같은 시 문장을 읽을 때 독자들은 긴장하고, 긴장이 겹치면 그냥 자지러진다. 다시 말하지만 자지러진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죄 짓는 일이 되지 않게 하소서” 하고 운을 뗀 다음, “사랑으로 하여 못 견딜 두려움으로/ 스스로 가슴을 쥐어뜯지 않게 하소서”라는 문장으로 외나무다리를 놓고, 다시 “사랑으로 하여 내가 쓰러져 죽는 날에도//내 무덤에는 그리움만/ 소금처럼 하얗게 남게 하소서”라고 끝맺음을 할 때 우리는 그것이 유행가일 것이라는 혐의를 갖고 있으면서도 그냥 빠져든다. 모르시는가. 자지러질 때는 항상 그렇듯 한 번 빠진 발을 빼낼 수가 없다.

자지러진다는 것, 안도현의 절규 앞에서 자지러진다는 것, 그것 때문에 한겨울 연탄불마저 식어버린 구들장을 맨몸으로 견뎌낸 인생들이 어디 한둘일 것인가.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는 말을 듣는 순간, 우리는 교주가 하사한 피죽 한 그릇에 감읍하면서 이튿날 헐벗은 맨발로 동냥에 나서는 앵벌이 소녀를 닮아버린다.

아무도 갖지 못한 안도현의 절규를 우리는 비웃고 부러워한다. 동상에 걸려 퉁퉁 부어버린 손가락에 침을 묻혀 오늘도 우리는 안도현의 시집을 한 장 한 장 넘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는 성인의 말씀을 듣는 듯한 호사한 착각이 스며든다. 잉크 밥을 오래 먹은 나도 그 정도는 쉽게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나 아무리 해도 도저히 써지지 않는 어떤 벽 같은 것을 느끼면서 사당 마당에 부복한다. 교주가 나올 시간이다.

안도현을 만난 적도 없으면서 안도현을 잘 알고 있는 듯이 행세를 해야 내 밥이 벌리는 시대에, 매일 밤 그렇게 익숙한 어조로 그의 시를 읊는 한밤 라디오의 음악 쇼 진행자들처럼, 나도 느끼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고, 잡은 손을 흔들어댄다. 너는 시인, 나는 부엉부엉 미네르바, 하고 농담을 할 수는 없었다. 이른 저녁이었다. 아침에 반팔을 입을까 긴 팔을 입을까 잠시 망설였을 봄 날씨였다. 서울 광화문통에 있는 어느 골목길에는 오양수산이라는 수상쩍은 횟집이 있었고, 1층에 방 한 칸을 내어 우리는 죽 앉았다. 안도현, 김요일, 함민복, 박후기.
우리는 요즘 우리가 얼마나 술을 절제하고 사는지에 대해 잠깐 얘기했다. 함민복은 재작년에 1년 동안 술을 먹지 않은 적이 있다고 했고, 안도현은 지난 2달 동안 끊었다고 했다. 스스로 가증스러웠다.
 
2009년의 비루하기 그지없는 정치적 분위기로 볼 때 대한민국 백성 치고 누구 하나 가증스럽지 않은 인간이 없었으니 시인, 기자인들 어디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으랴 싶었다. 브레이크를 힘껏 밟고 있다가 액셀레이터로 발을 옮겨야 타이어 타는 냄새를 맡으며 급발진을 할 수 있기는 하다. 약간 어수선했다. 교주가 내심 긴장하고 있었다. 기자가 먼저 소주폭탄을 섞어서 한 순배를 돌렸다. 샴페인 소폭이라며 가증을 떨었다. 첫 질문.
 
대여섯 살 때 사진 중에서 잘 나온 것 한 장. 오른쪽부터 어머니, 안도현 시인, 할머니, 고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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