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서투른 화가(畵家)여요
잠 아니 오는 잠자리에 누워서 손가락을 가슴에 대이고,
당신의 코와 입과 두 볼에 새암 파지는 것까지 그렸습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적은 웃음이 떠도는 당신의 눈자위는,
그리다가 백 번이나 지웠습니다.
나는 파겁 못한 성악가(聲樂家)여요
이웃사람도 돌아가고 버러지 소리도 그쳤는데
당신의 가르쳐주시던 노래를 부르려다가
조는 고양이가 부끄러워서 부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가는 바람이 문풍지를 스칠 때에, 가만히 합장하였습니다
나는 서정시인이 되기에는 너무도 소질이 없나봐요
'즐거움'이니 '슬픔'이니 '사랑'이니 그런 것은 쓰기 싫어요.
당신의 얼굴과 소리와 걸음걸이와를 그대로 쓰고 싶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집과 침대와 꽃밭에 있는 적은 돌도 쓰겠습니다.
*작가 이야기
한용운: 법호는 萬海(만해) 1879년 충남 홍성 출신, 1896년 동학에 가담 하였으나 운동에 실패로 설악산 오세암으로 피신한 것이 계기가 되어 불문에 귀의, 1909년 '불교 유신론'을 발표하는 등 불교계의 혁신운동을 폈으며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1919년 민족대표 33인으로 서명 투옥되었으며 1926년 그간의 시작품을 모은 '님의 침묵'을 간행하였다. 한용운은 김소월과 함께 1920년대 대표시인으로 불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형상학적인 깊이를 확보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생애나 사상이 시와 일치되지 않는 여타의 동시대 시인들과는 달리, 한용운은 시와 살아온 생애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시세계는 '님의 침묵'으로 표현되는 식민지 현실 혹은 바람직한 가치가 부재하는 공간속에서 끊임없는 있음과 없음의 변증법을 통하여 님과 끊어지지 않는 유대관계를 제시하고 고도의 형이상성을 가지고 있는 세계로 평가된다. 또한 그런 상실과 회복의 변증법적인 긴장관계를 사랑에 빠진 듯한 여성 화자의 어조를 통해 표현함으로써 예술적인 형상성 역시 풍부하게 확보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의 시는 개인과 사회, 종교적 진리와 예술이 차원 높은 수준에서 접맥되는 세계를 창조하는 한편, 폭 깊은 은유와 상징적인 시적 진술의 방법론을 실현시켜 한국 현대시사의 사상적, 형상적 토대를 마련한 중요한 시사적 위치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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