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수필

흰 바람벽이 있어

구름뜰 2011. 2. 20. 20:13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 던지고 
때글은 낡은 무명 샷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 
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 하듯이 

--백석



'시와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해  (0) 2011.02.24
움직이는 근심은 가볍다  (0) 2011.02.22
초봄 오시네  (0) 2011.02.19
나쁜 지지배들  (0) 2011.02.18
세가지 방문   (0) 2011.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