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살인을 한다
그러나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
우리들의 옆에서는
어린놈이 울었고
비오는 거리에는
사십명 가량의 취객들이
모여들었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
아는 사람이
이 캄캄한 범행의 현장을
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
——아니 그보다도 먼저
아까운 것이
지우산을 現場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
1963년
- 김수영(1921~1968)
그는 평생 링 아래서 싸웠다. 답이 안 보이는 현실이, 지리멸렬한 일상이 그의 싸움터였기 때문이다. 초라하고 사납고 서럽게, 하지만 정직하게 그는 그곳에서 버티었다. 일상의 순간순간은 사실 저마다 절체절명의 고비들이다. 생활인은 누구나 ‘치사 빤스’를 입고 있다. 마누라를 패고 집으로 도망쳐 와서는 남의 이목이 두려워 전전긍긍하고, 두고 온 지우산 따위에 연연하며 사정없이 쪼그라드는 이 소시민을 보시라. 우리도 필시 이 비슷했던 적이 있다. 그와 우리는 닮았다. 하지만 그는 그걸 말하고 우리는 말하기를 꺼린다. 그의 시는 시에 닿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 시 자체가 된 드문 사례다. 띄엄띄엄 화려한 조명 아래 올랐기 때문이 아니라 고달프고 끈질기게 훈련에 매달렸기에 그는 시의 승리자가 될 수 있었지 않을까. 그의 링사이드가 늘 만원사례인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 이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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