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대문 시장 추운 뒷골목에 들어섰을 때
난 남루한 길바닥에 줄줄이 앉아 있는
보라빛 구근들을 보았네
추위 때문인지 쇠단추처럼 단단하게
오그라진 구근들의
이름은
그러나 광석질이 아니고
화사하게도 히아신스와 크로커스라고 했지
어디서 굴러먹다 온
돌멩이처럼
볼품없는 구근들은
한 개에 오백 원씩,
그 이름을 말할 때
초라하게 살결이 튼 행상 아줌마의
입술에선 이상하게도 봄 향기와 봄 들판의 환히
열려진 꽃봉오리들이 바람의 치아처럼 언뜻 보였네,
난 그것들의 생명을 믿지 않았고
그것들의 기다림을 믿을 수도
없었지
너와 나는 이미 가망이 없어 보였고
이 도시--긴 겨울--
빙하가 단단한 얼음 벽돌들을 층층이 쌓아올려
빙하 시대의 완강한
불임권을
형성한
이 곳에서
나는 차마 하나의 구근에서 싹이 트고
꽃이 피는 이적을 기다릴 수는 없었네
나는 그냥 지나쳐서
바삐 걸어갔지
사람과 부딪치며 계속 난전들의 골목을
헤쳐가고 있을 때
난 아득하게도 어디선가 들려 오는
강물 삐걱이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어,
모든 봄은 한 개의 꽃 뿌리에서 시작되고
모든 빙하는 한 개의 꽃봉오리에서부터
녹기 시작한다고
그것은 내 머리에서 피가 도는 소리 같았고
그 환각의 약초가 흔드는
꽃바람 방울 소리는
어질어질 나의 수족마비의 겨울 문고리를
잡아 헤뜨리고 있었네
황망히 뒤돌아
다시 그 시장통 골목을 찾아갔을 때
어디서 굴러먹다 온 개 뼈다귀처럼
못생긴 그 구근들이
어쩌면 미륵불을 닮아보였고
집에 돌아온 나는
물병 위에 그 보랏빛 구근들을 심어
햇빛 바른 창턱 위에 환히 올려 놓고
이것이 내일인가--
아 이것이 내일이다--
매일 아침 물병 속으로 뻗어가는
봄 꽃들의 파란 실뿌리를 오래오래
기쁨에 차서 바라보는 것이었네
그리고, 친구여,
나에겐 내일이 생겼어,
비로소 난 가졌지,
기다리는 봄을,
이것이 내일이다고 외칠 수 있는
자그만 한 개의 사랑스런 봄을
-김승희
** 내가 다니는 도서관은 쌍둥이건물이다. 한 동은 성인용이고 반대편은 어린이 도서관이다. 어린이 도서관은 이른아침부터 어린이집, 유치원, 학원 같은 곳에서 견학을 온다. 재잘 재잘, 녀석들이 내는 소리는 이른 아침 새소리 만큼 청량하다. 정적을 지켜야 하는 공간에서도 이 아이들의 소리만큼은 총총히 사라지지 말고 좀 더 놀다갔으면 싶을 정도다.
상념이 많았던 어제 오전, 견학하고 나오는 무리중에 나와 눈이 딱 마주친 여자아이가 있었다. 인형처럼 머리를 양갈래로 묶은 아이였다. 배도 뽈록 엉덩이도 뽈록 뺨은 더 뽈록, 가까이 다가가서 손을 내미니 짝지랑 잡은 손은 그디로 두고 왼손을 넌저시 내게 내밀어 주었다. 이런 영광이라니, 말도 제대로 못할 것 같고 키는 함 뼘 두뼘, 30센티 자로 두번만 재면 될 것 같은, 말은 할 까 싶어 물어보니 말을 잘 한다고, 24개월 전후 된 아이들이라고 했다.
한 번 안아보고 싶고, 뺨도 만져보고 싶었다. 하지만 어쩌나 내 손자도 아니고 내 아이도 아니니 보는 것으로 족해야 했다. 모든 어린것(새끼)은 다 예쁘다. 먹구름 같던 상념이 순식간에 사라진 느낌이랄까. 생각도 없어지던 그 순간이 사진을 보니 다시 생각난다. 그 아이는 왜 나를 그렇게 쳐다 보았을까. 내가 그 아이를 본 것은 끌림같은 거였는데. 그 아이도 그랬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