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시를 쓰고 싶다
눈길을 걷다가 돌아보면 사라진 발자국 같은
봄비에 발끝을 내려다보면 떠내려간 꽃잎 같은
전복되는 차 속에서 붕 떠오른 시인의 말 같은
그런 시
사라지는 시
쓰다가 내가 사라지는 시
쓰다가 시만 남고 내가 사라지는 시
내가 사라지고 시 혼자
컴퓨터 모니터 속 A4용지 왼쪽 정렬
글꼴 신명조 글자 크기 12에 맞춰
한 줄 한 줄 써내려가거나
유품을 수거한 비닐 팩 속에서
뿌려진 피와 함께 수첩의 남은 페이지를
쓱쓱 써내려가는
그런 시
마음먹은 대로 글을 이끌어나가는 건 쉽지 않다. 배열이 아무래도 상관없다면 손 가는 대로 쓰면 그만이지만 문장과 문장 사이의 거리를 고려하고자 한다면 이야기는 좀 달라진다. 어느새 고집 센 염소 한 무리의 행군을 지휘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문장들이 뻗대기 시작할 때 그러나 화를 내면 안 된다. 한 발 양보해 잘 달래지 않으면 엉뚱한 곳으로 달아나버리기 십상이고 그러면 다시 앞에서 하나씩 줄을 맞추어야 되기 때문이다. 흩어진 문장들을 단단하게 옳아매는 일은 개미 백 마리를 부산에서 서울로 몰고 오는 일만큼 힘들다. 일기나 편지 같은 글도 그런데 시는 말해서 뭣할까. 제 삶에서 독창적인 목소리를 궁리하기 위해 시인은 하얗게 젊음을 불태우며 영혼을 불사르고 피를 말린다. 통념을 지워내고자 상상의 날개를 펄럭이며 오늘도 아무도 밟지 않은 백지 위에 힘겹게 문자의 깃발을 꽂는다.
- 조재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