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보라치는 황태덕장
장엄하면서도 서러워
줄선 모든 존재는 슬퍼
부동과 침묵의 그 대열
죽음 아닌 인내의 모습
입춘 다음 날 강원도에는 풍성히 눈이 내렸는데, 카메라가 전하는 가로수와 산길, 마을을 감싸안은 설경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누구에게나 잊을 수 없는 풍경이 있고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겠다. 풍경이 단편적이라면 장면은 연속성을 가진다 할까. 내 기억의 잊을 수 없는 장면 중 하나가 바로 강원도의 설경이다. 눈으로 인한 폐해가 그 낭만성을 가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설은 시간을 초월하여 그 존재를 각인하고도 남음이 있다. 눈 소식을 접하자 몇 년 전 평창을 거쳐 대관령을 지날 때 만난 풍경 하나가 선연히 떠올랐다.
눈보라가 치는 그곳은 순백의 세상이었고 산과 들의 풍광을 완만하게 다독이는 백색의 조화는 슬프도록 눈부셨다. 그렇게 눈 내리는 길을 휘돌다 한 굽이에서 황태덕장을 만났다. 화면이나 사진에서 여러 차례 보아왔지만 직접 맞닥뜨린 덕장의 모습은 장엄하고 고요했으며 비장하고 서러웠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대열이 저토록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 견디고 있단 말인가. 일렬종대 수 겹씩 도열한 대열 가까이서 나는 차를 내렸다. 아가미를 다 꿰인 명태가 온몸으로 견디고 있는 것은 눈보라가 아니고 먼 시간이었으며 선택이 아니라 절대였던 것을 어떻게 설명할까.
세상의 줄 선 모든 존재들은 슬프다는 느낌이 밀려왔다. 차례나 질서를 위한 자발적인 대열을 제외하면 사실 모든 줄은 가혹하다. 뭐가 그리 중요했는지는 모르나 어릴 적 뙤약볕을 견디던 긴 조회시간과 훈화시간이 그러했고 아버지의 기억에서 나오는 가난의 배급 줄이 그러했으며 군대의 한 치 삐뚤어지지 않은 정확한 대열이 그러하다. 강요된 줄, 더구나 자로 잰 듯 맞춤한 그 줄들은 인간의 줄이 아닌 듯해 더욱 불편했다. 나는 로터리 화단에 줄 맞추어 핀 꽃들에게서도 어지럼을 느낀다. 그렇게 부동의 존재들은 죄다 슬픈 것이다.
그렇듯 눈보라를 가르고 선 덕장의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엄숙했는데, 침묵하는 그 대열은 죽음의 모습이 아니라 인내하는 수도자의 모습이었다. 어떤 시간이 그들을 이토록 깊게 했을까. 아가미를 벌리고 하늘을 향해 도열한 그 모습은 인간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듯, 나는 왠지 미안하고 민망하여 함께 눈 맞는 것으로 마음을 대신하고 싶었다. 견디는 일은 대개 약자의 소임일 경우가 많지 않은가. 지배하고 명령하는 자는 견디는 편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보잘것없이 보이겠지만 우리는 견디는 삶에 대해 달리 생각해야 한다. 견디는 자의 위치는 두드러진 자리가 아니라 채워주는 자리이며 뾰족하게 날 선 자리가 아니라 뭉툭한 울음의 자리이다. 그건 곧 아버지의 자리가 아니라 어머니의 자리이며 권리의 자리가 아니라 의무의 자리라 할까. 그러다 바람이 일자 덕장의 대열에서 낮은 음악이 들려왔다. ‘우우우’ 그건 분명 대열 사이에서 나오는 합창이었다. 선두와 말미, 그리고 위와 아래의 구별을 지운 평등한 자리에서 울려 나오는 노래.
합창은 그런 것이다. 평생 더 두드러지기 위해, 더 나아보이기 위해 애써온 인간의 독주에 비해 그들은 함께 익힌 몸의 노래를 하고 있었다. 눈보라와 함께했던 장엄한 대열, 그리고 조용히 울려 퍼지던 노래…. 그러나 돌아서면 인간은 다시 제 자리에 머무는지. 잊을 수 없고 잊히지 않는 풍경을 뒤로 하고 하필 그날 예정된 식당이 황태구이 식당이었던 것. 이렇게 인간의 욕망은 유치하고 행위는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나 보다. 제 꼬리를 물고 도는 짐승처럼 제가 사는 자리가 죽는 자리라는 말을 새삼스럽게 떠올리면서.
이규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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