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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시를 읽고 외우는 이유

구름뜰 2015. 7. 11. 09:38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너도 그렇다.”(나태주 ‘풀꽃’)

 

어디서 많이 들어본 시 아닌가? 맞다.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글판에 대문짝만 하게 쓰여 있던 시구다. 복잡한 도심에서 길을 걷다가 혹은 버거운 일과 후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스치듯 읽은 이 짧은 시가 얼마나 많은 사람의 마음을 촉촉하게 해 줬을까? 그 때문에 나는 광화문 글판의 왕팬이다. 그냥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글을 빠짐없이 외우고 일상에서 요긴하게 쓰고 있다. 얼마 전에도 힘겨운 시간을 보내는 친구에게 위로의 말 대신 글판 덕분에 외웠던 짧은 시를 적어 보냈다.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저 안에 태풍 몇 개/저 안에 천둥 몇 개/저 안에 벼락 몇 개.”(장석주 ‘대추 한 알’ 중에서)

 

보기와는 달리(!) 나는 오래전부터 시를 읽고 외우는 습관이 있다. 시작은 말 빠른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어릴 때부터 말이 빨라 지적도 많이 받고 야단도 많이 맞았다. 사춘기 때는 그 때문에 덤벙대고 경솔하게 보이는 게 너무 싫어 손등에는 볼펜으로, 집안 구석구석에는 매직펜으로 큼직하게 ‘천천히!’라고 써 놓고 고쳐 보려고 무진 애를 썼다. 어른이 돼서는 단전호흡과 기운동도 열심히 배워 봤지만 내 말하는 속도는 좀처럼 줄지 않았다. 입만 열면 말 빠르다는 소리를 듣는 게 얼마나 큰 스트레스였지는 모른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노력해도 안 되는 걸 보면 나는 말 빠른 DNA를 타고난 게 분명해. 그러니 더 이상 DNA에 저항하느라 힘 빼지 말자.”

 

대신 노력하는 만큼 좋아지는 발음을 정확히 하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택한 방법은 시 읽고 외우기! 시집, 신문, 지하철, 교보빌딩 글판까지 도처에서 만나는 시들을 일단 소리 내어 한 번 읽고 마음에 들면 바로 외우고 있다. 지난 40년간 이렇게 읽은 시가 1만여 편, 읽고 또 읽어 절로 외워진 시 또한 수백 편이다.

 

매일 시를 읽으니 좋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제일 좋은 건 시 자체의 아름다움이다. 농축되고 절제된 시어와 입에 착착 붙는 부드러운 운율은 매번 깊고 험한 산속에서 예쁜 야생화를 만난 것처럼 반갑고도 신기하다. 또한 외운 시구절들이 나도 모르게 내 글과 말에 녹아들어 멋과 맛을 더해 주기도 한다. 무엇보다 시 낭송할 때는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소리 내야 하니 빠른 말투를 정확한 발음으로 보완할 수 있어 일석삼조다.

 

실은 한국 시뿐 아니라 외국 시도 외운다. 몇 년 전 베이징(北京)에서 어학연수할 때 당시와 송시를 하루에 한 편씩, 100수 이상 외웠다. 중국에서는 초등학생들도 당시 300수 정도는 거뜬히 외운다. 어릴 때 구구단 외우듯 한 거라 어른이 돼서도 남녀노소·도농빈부·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르면 나오는 자판기 수준으로 전 국민이 시를 줄줄줄 읊는다. 이러다 보니 일상생활 중 누군가 상황에 딱 맞는 시로 한 구절 운을 띄우면 옆에 있는 사람들이 목청을 돋워 다음 구절을 합창하는 걸 자주 봤다. 그때마다 무진장 부럽고 멋져 보였다.

 

한번은 우연히 중국 고위 관리를 만났다. 재미있게 이어지던 대화가 그 사람이 남북 통일은 절대 안 된다고 단정적으로 말해, 나도 대만과 중국 통일 역시 불가능하다고 했더니 한순간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다음 순간, 그 관리가 갑자기 조조의 셋째 아들이 지은 칠보시 첫 두 구절 “煮豆燃豆<8401>(자두연두기-콩대를 태워서 콩을 삶으니) 豆在釜中泣(두재부중읍-솥 안에 있는 콩이 눈물을 흘리네)”을 읊는 게 아닌가? 마침 며칠 전에 그 시를 외웠던 터라 질세라 나머지 두 구절을 이어 읊었다.

 

“本是同根生(본시동근생-본래 한 뿌리에서 태어났건만) 相煎何太急(상전하태급-서로 어찌 이리도 심하게 들볶는가)?”

 

이 시의 내력은 이렇다. 조식은 글재주가 뛰어나 조조의 총애를 받지만 형의 질투도 많이 받았다. 조조가 죽은 후 왕이 된 형은 조식에게 일곱 걸음 안에, 형제라는 말없이 형제에 관한 시를 한 편 짓지 못하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렇게 탄생한 시는 의미심장하다. 콩을 삶으면 콩 속의 수분이 하얗게 눈물처럼 미어져 나온다. 콩의 입장(조식)에서 보면 원래 한 뿌리에서 났건만 콩대(형)가 자신을 삶아대니 억울해서 눈물이 난다는 내용이다. 형제간의 불화에 흔히 인용하는 시로, 그 사람이 우리 남북 관계를 빈정대듯 빗대어 읊은 시를 내가 중국과 대만 관계도 마찬가지라며 맞받아친 거다.

 

뒤 구절이 끝나자 그가 놀란 눈으로 날 쳐다보더니 새삼스레 악수를 청하면서 술을 한 잔 권하는 걸로 분위기는 다시 화기애애해졌다. 시 한 편으로 살벌한 분위기가 단박에 공감으로 변했고 그와 나는 지금도 국경을 넘나드는 우정을 나누고 있다.

 

한 편의 시는 이렇게 부드럽고 이렇게 힘이 세다. 게다가 발음까지 정확하게 만들어 준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신나게 시를 읽고, 외우고, 권하고 있다.

-한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