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기사

불효합시다!

구름뜰 2016. 4. 13. 21:56


우린 자기욕망에 무지하고
남의 욕망만을 섬겨오다가
패배감에 트라우마 키운다
자기욕망 문화를 만들려면
권위주의에서 벗어나야 해


 

당신의 욕망은 안녕하신가.

인류는 그동안 자기 욕망을 이룬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절감했다. 원시시대 때는 ‘천재지변’, 중세 때는 ‘신(神)’, 자본주의 때는 ‘자본’이 자기 욕망처럼 비쳐졌다. 이젠 스마트 세상, 인간의 욕망이 기계의 욕망으로 대체중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스마트폰이 자기 욕망의 실현도구라고 믿는다. ‘스마트폰을 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믿는다. 자기 욕망에 둔감해지니 다들 뭘 하고 싶은지 모른다. 공교육이 자기 욕망 찾기를 방해한 것이다.

부처와 예수는 모르긴 해도 인류 최초로 자신의 욕망을 정확하게 간파한 것 같다. ‘자기 욕망의 주인공이 되는 것, 그게 인류 최고의 혁명’이라고 신지학자 크리슈나무르티는 말했다.

남의 욕망에 충실한 사람일수록 더 권위주의적이다. 용서와 배려보다 시기, 질투, 복수, 저주에 길들여져 있다. 대화보다 주장에 솔깃하다. 역지사지하는 힘도 허약하다. 물정과 실정, 본심과 진심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한다. 소비적인 것을 문화적인 것으로 착각한다. 남자는 ‘허세’, 여자는 ‘허영’의 포로가 된다. 패배감이 트라우마를 만든다. 항상 ‘한 방’을 기다린다. 이런 기질을 가지고 있을수록 히틀러 같은 독재자의 출현을 은근히 바란다.

보수와 진보도 마찬가지다. 진보는 남의 욕망 무시하기, 그게 자기 욕망이다.

툭하면 ‘그래도 박정희·전두환 시절이 좋았다’는 이들이 있다. 가난에서 해방시켰고 장사하기 좋아서 그렇단다. 그 논리는 너무나 생계지향적이다. 경제지상주의는 독재를 부른다. 하지만 ‘문화지상주의’로 건너가면 국민정신보다 ‘시민정신’이 더 소중해진다. 국민은 그럴듯해 보여도 타자 욕망시절의 상징물이다. 시민은 남보다 자기욕망에 천착한다. 경제지상주의 시절엔 욕심, 문화시대로 오면 욕망이 주인 행세를 한다.

이제는 욕망의 시절. 하지만 문제는 자기욕망보다는 타자의 욕망을 더 섬긴다는 것. 타자의 욕망은 자본주의의 속물성과 직결된다. ‘카더라 방송’, 스타 마케팅에 쉽게 휘둘린다. 유능한 것과 유명한 것의 차이를 분간하지 못한다. 축재를 기부보다 더 중시한다. 물건보다는 상표, 마음씨보다 맵시를 더 중시한다. 진실보다 진리, 성실보다 성공을 더 섬긴다.

진리도 해묵은 개념이다. 진리도 타자욕망 시대의 산물이다. 이젠 진리보다 진실이 더 값어치 있다. 진리는 자신을 합리화할 수 있다. 진실은 자기욕망을 정확히 간파했을 때 정립된다. 진리는 증명불가다. 그래서 과대망상적 운동가가 선호한다. 진리는 협상불가. 진리끼리 대립하면 비극이 생긴다.

진정한 지도자라면 승리를 독점하지 않는다. 멸사봉공이 리더의 덕목이 아니라 모두의 몫이란 걸 안다. 누구나 장수와 병졸이 될 수 있다는 걸 안다. 그런 세상에서는 나쁜 자리도 높은 자리도 없다. 고정관념, 관행, 편견도 설 자리를 잃는다.

세계적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은 ‘세상사는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 가보면 비극’이라 했다. 지금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도시의 야경은 부유해 보이지만 서민의 삶은 곡소리투성이다. 상당수 학생들의 근육은 공부하는 근육밖에 없다. 그러니 부모가 자식을 봉양하는 형국이다. 그런 나약한 근육을 가진 청년에게 맞는 직업은 무엇일까. 최근 서울시 7급 공무원 경쟁률이 288대 1이었다.

1992년에 등장한 서태지는 자기욕망의 시대를 선포했다. 2008년 ‘싸구려 커피’란 노래로 청년백수의 한을 대변했던 가수 장기하. 둘의 기운을 합쳐 2013년 뽕짝 블루스 가수로 등장한 김대중씨. 그가 부른 ‘불효자는 놉니다’란 노래를 음미해 보시길. 남의 욕망 시대에는 불효자는 울었다. 하지만 자기 욕망의 시대에는 논다. 잘 노는 게 삶의 최대 승부처인지도 모른다.

자기욕망당의 불효자. 그가 남의 욕망당의 효자보다 더 당당해 보이는 세상이 과연 올까. 오늘은 선거일이다. 아무튼 투표는 하고 불효합시다.
- 이춘호 주말섹션부 차장 영남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