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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모르는 장소

구름뜰 2016. 3. 22. 08:57

 

비가 온다. 한적하게 오는 비는 나를 감상에 젖게 하고, 잊었떤 학창시절의 모습과 그때의 작은 추억을 떠올리게도 한다. 비만 오면 벌떼처럼 선술집을 찾아들었던 이들의 왁자지껄한 수다와 논쟁의 내용은 이미 오래 전에 잊었지만 허심탄회하게 서로의 속생각과 생활의 잣대를 견주어 비교하던 그 장면들은 여전히 흑백영화의 필름처럼 애잔하게 남아 있다. 내게 어떤 것에 대한 기억은 사람보다 오히려 장소에서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더 많다. 아마도 그때의 그곳, 그때의 그 공간이 내가 지금 추억하는 것들의 가치를 만들어 주었으리라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무언가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해주는 그 공간으로 말미암아  가끔씩 내 삶은 윤택해짐을 느낀다. 그래서 기억하는 장소가 많은 어떤 이의 생활이 나보다 훤씬 더 아름다워 보이기조차 한다.


하지만 내가 성장해 가는 데는 이러한 바깥의 공간만이 아닌, 훨씬 더 내밀한 혼자만의 공간 역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어쩌면 버지니아 울프가 이야기한 자기만의 방이 비단 여성에게만 필요한 것아 아닐지 모른다. 그곳이 사진이나 편지, 밑줄의 흔적을 지닌 책이 있는 서재라면 좋겠지만, 그럴 엄두도 내지 못하는 나 같은 처지에서는 거실의 소파라도, 안방의 작은 앉은뱅이 책상이라도, 아니면 나만이 알고 있을 법한 어느 외진 곳의 카페라도 좋겠다. 거기서 일상의 일들에 갈등하며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머리를 싸매기보다 잠시 자신의 마음속으로 천착해 들어가 누구의 가슴도 없이 스스로를 사랑하고, 질책하고, 슬퍼하고, 우울할 수만 있다면 나는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들 삶에서 나만의 공간이 주는 의미는 함축적으로 몽상이라는 단어에서 찾을 수 있다 . 그곳에서 나 스스로를 사색하는 행위가 곧 몽상이기 때문이다. 색채 없는 일상에 색채를 주고, 소음만 가득차 있던 시간에 음률을 주기에. 나는 이 몽상이 우리의 삶을 더욱 가치있게 만든다고 믿는다. 유년시절의 농촌의 빈 들판에 묶여 있던 볏짚단으로 집을 짓고 누워 달이 뜨는 하늘을 보며 하던 몽상, 이건 아마도 얼마 전 장만해 준 인디언 텐트에서 책을 읽고 놀이를 하며 젖어드는 아이의 몽상과도 맞닿아 있을 것이다. 설명할 수도, 하지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기만의 방에서 만들어지는 아이와 같은 몽상이 깊어질수록 나의 의식은 오히려 현명해지곤 한다. 이와 함게 나의 일상은 서가에 제대로 꽂힌 책들처럼  분명한 카테고리를 지니며 정리가 되어가고 ..... 비오는 날, 몽상의 힘을 믿는 나는 자기만의 방을 찾아 다시 또 내일의 에피소드를 준비하려 한다.

-이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