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옛날 어느 집에 한 여인이 찾아왔다. 화사한 옷을 입은 아름다운 귀부인이었다. 집 주인이 “누구신지요?”하고 정중히 묻자 여인이 답하길 “나는 공덕천(功德天)입니다. 가는 곳마다 행운을 불러오고 재물이 불어나게 해주지요.”라고 대답했다. 집 주인은 기뻐 어쩔 줄 모르며 향을 피우고 꽃을 뿌리며 여인을 극진히 집으로 모셔 들였다.
그런데 곧이어 또 한 여인이 찾아왔다. 더러운 누더기를 걸친 추한 여인이었다. “아니, 댁은 누구요?”라고 주인이 묻자 여인은 “나는 흑암천입니다. 가는 곳마다 재난을 불러오고 재물이 줄어들게 하지요.”라고 대답했다. 주인이 기겁을 해서 칼을 들고 나와 휘두르며 “썩 꺼져라. 가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고함쳤다.
그러자 여인은 비웃으며 말했다. “그대는 참 어리석군. 방금 그대가 집에 영접한 여인이 바로 나의 언니요. 우리는 쌍둥이로 반드시 붙어 다니게 되어 있소. 내가 떠나면 언니도 떠날 것입니다.” 그러자 앞서의 여인도 말했다. “내가 여기 있으려면 내 동생도 여기 있어야 합니다.”
어릴 때 이 이야기를 우연히 듣고 난생 처음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내가 집 주인이라면 과연 저 쌍둥이를 모두 맞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모두 내쫓을 것인가? ‘아니, 왜 공덕천만 받으면 안 돼? 왜 그렇게 정해진 거야?’하고 불끈 짜증을 내며 생각을 포기해버렸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가 뚜렷한 기억으로 남은 건 어린 마음에도 세상의 이치를 어렴풋이 짐작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곧이어 또 한 여인이 찾아왔다. 더러운 누더기를 걸친 추한 여인이었다. “아니, 댁은 누구요?”라고 주인이 묻자 여인은 “나는 흑암천입니다. 가는 곳마다 재난을 불러오고 재물이 줄어들게 하지요.”라고 대답했다. 주인이 기겁을 해서 칼을 들고 나와 휘두르며 “썩 꺼져라. 가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고함쳤다.
그러자 여인은 비웃으며 말했다. “그대는 참 어리석군. 방금 그대가 집에 영접한 여인이 바로 나의 언니요. 우리는 쌍둥이로 반드시 붙어 다니게 되어 있소. 내가 떠나면 언니도 떠날 것입니다.” 그러자 앞서의 여인도 말했다. “내가 여기 있으려면 내 동생도 여기 있어야 합니다.”
어릴 때 이 이야기를 우연히 듣고 난생 처음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내가 집 주인이라면 과연 저 쌍둥이를 모두 맞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모두 내쫓을 것인가? ‘아니, 왜 공덕천만 받으면 안 돼? 왜 그렇게 정해진 거야?’하고 불끈 짜증을 내며 생각을 포기해버렸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가 뚜렷한 기억으로 남은 건 어린 마음에도 세상의 이치를 어렴풋이 짐작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일본의 길상천도(8세기, 나라시대), 일본 나라 약사사 소장](http://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701/09/htm_2017010905249268149.jpg)
일본의 길상천도(8세기, 나라시대), 일본 나라 약사사 소장
성장하면서 이것이 불교 경전 『열반경(涅槃經)』에 나오는 우화라는 것을 알게 됐다. 공덕천은 길상천(吉祥天)으로도 불리며 복을 주는 여신으로 (사진 1) 고대 인도신화와 힌두교의 풍요와 행복의 여신 락슈미(Lakshmi)에서 유래했다는 것도. (사진 2)
![인도의 락슈미 조각 (13세기), 미국 LA 카운티 뮤지엄(LACMA) 소장](http://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701/09/htm_2017010905249408266.jpg)
인도의 락슈미 조각 (13세기), 미국 LA 카운티 뮤지엄(LACMA) 소장
그리고 성인이 되어 새삼 깨달았다. 공덕천과 흑암천은 쌍둥이일 뿐만 아니라 아예 한 몸의 두 얼굴이며, 결코 서로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내리막이 있으면 오르막이 있고, 그 어느 쪽의 상태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그럼 둘 다 맞이할 것인가, 쫓을 것인가? 학부에서 경제학을 전공하며 ‘불확실성 하의 선택’을 공부할 때 장난스럽게 생각해본 적이 있다. 공덕천과 흑암천의 파워가 같아서 각각 주는 이익과 손해의 크기가 동일하고 그 확률이 반반이라고 전제하면, 위험회피적(risk-averse)인 사람은 둘 다 쫓아내고 위험선호적(risk-loving)인 사람은 둘 다 맞아들일 것이라고.
불교 철학에서는 둘 다 물리치는 것이 희비와 고락의 굴레에서 벗어나 니르바나(Nirvana)에 도달하는 길이라고 들은 것 같다. 하지만 속세에서 치열하게 살고자 하는 인간은 둘 다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그 둘이 언제나 함께라는 사실만 잊지 않으면 혼탁한 세상에 중심을 잡고 서서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구름이 잔뜩 낀 이 새해에도.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그럼 둘 다 맞이할 것인가, 쫓을 것인가? 학부에서 경제학을 전공하며 ‘불확실성 하의 선택’을 공부할 때 장난스럽게 생각해본 적이 있다. 공덕천과 흑암천의 파워가 같아서 각각 주는 이익과 손해의 크기가 동일하고 그 확률이 반반이라고 전제하면, 위험회피적(risk-averse)인 사람은 둘 다 쫓아내고 위험선호적(risk-loving)인 사람은 둘 다 맞아들일 것이라고.
불교 철학에서는 둘 다 물리치는 것이 희비와 고락의 굴레에서 벗어나 니르바나(Nirvana)에 도달하는 길이라고 들은 것 같다. 하지만 속세에서 치열하게 살고자 하는 인간은 둘 다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그 둘이 언제나 함께라는 사실만 잊지 않으면 혼탁한 세상에 중심을 잡고 서서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구름이 잔뜩 낀 이 새해에도.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