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수필

청파동을 기억하는 가

구름뜰 2017. 4. 14. 08:11

 


겨울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눈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뜻한 땅속을 떠돌 동안엔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 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 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

그래, 나는 소리없이 오래 찔렸다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오래 기어서라도

가고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따뜻한 불빛 안으로 숨어들어가

다시 한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그리고 지금, 주인없는 해진 신발마냥

내가 빈 벌판을 헤맬 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눈 덮인 꿈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을

-최승자 (1952~)


* 꽃잎처럼 포개진....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꽃진 자리에 새 순이 나고 있다.

전지한 매화나무 가지를 주워다 꽂아 두었는데 꽃이 피더니 그 꽃 지고 잎이다

추억은 잎처럼 남았고

사랑은 꽃처럼 갔다. 


흩날리는 떨어지는 꽃같은 시.... 들.. 시 인들...          




 

근황


못 살겠습니다

(실은 이만하면 잘 살고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원한다면, 죽여주십시오.


생각해보면,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게 내 죄이며 내 업입니다.

그 죄와 그 업 때문에 지금 살아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잘 살아 있습니다

-최승자 시집 , 내 무덤 푸르고, 문학과 지성사


*일주일 쯤 전에..... 포항의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최승자 시인의 '청파동을 기억하는가'라는 시를 알게되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이 시를 다시 보면서, 시인의 근황이 궁금하여 검색해보니.  '근황'이라는 시가 있었다. 


근황을 이렇게도 전하다니.. 사랑을 이렇게도 근황할 수 있다니..


만날 수 없고, 그와  살아서도 안되는 그래서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는 것을 고백하고 그것이 죄이며 업이라고..그럼에도 그래서 못살겠다 해놓고 그래도 살만하다고 하고, 사랑은 어쩔 수가 없으니 죽여달라고 한다. 그래도 사랑해서 미안하다는,..... 그래도 그래놓고는 근황이니 마지막으로 던지는 말...


잘 살아 있습니다. 

이런 달려가 보고 싶은 근황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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