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수필

시인과 화가 -절간의 소 이야기

구름뜰 2017. 4. 23. 06:26



 


병이 들면 풀밭으로 가서 풀을 뜯는 소는 人間보다 영(靈)해서

열 걸음 안에 제 병을 낫게 할 藥이 있는 줄을 안다고 

首陽山의 어늬 오래된 절에서 七十이 넘은 로장은

이런 이야기를 하며 치마자락의 山나물을 추었다 

- 백석,



김영진 화가의 <백석평전> 중에서

 

[대통령= 김유원(buy1004)] 이중섭은 백석 시인의 시 한 편을 읽고 1936년 이후 소 그림을 열정적으로 그리기 시작한다. 인간보다도 낮은 존재인 소가 인간보다 지혜롭다는 것을 알려주는 그 시는 ‘절간의 소 이야기’이다.

 

‘병이 들면 풀밭으로 가서 풀을 뜯는 소는 인간보다 영(靈)해서

열 걸음 안에 제 병을 낫게 할 약(藥)이 있는 줄을 안다’ (절간의 소 이야기 中에서)

 

이중섭은 일본에서부터 소 그림을 그렸는데, 바로 백석의 시집 ‘사슴’에 나오는 ‘절간의 소 이야기’를 접하면서 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백석이 이 시를 1936년도에 발표하였는데, 이때의 이중섭은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 제국미술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조선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올 때마다 이중섭은 백석의 시를 접하고는 조선의 소 그림을 그리면서, 인간보다 지혜로운 소가 되고자 하였다. 그는 얼마나 소 그림을 좋아하였는지, 소와 입맞춤하는 것을 보았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였다.

 

백석이 ‘절간의 소 이야기’를 발표한 지 4년이 지나 이중섭은 1940년에 ‘자유미협’ 공모전에 ‘서 있는 소’를 출품하게 되었다. 이때로부터 본격적으로 이중섭의 소 그림이 시작된 것이다. 오산학교의 정서는 북방 민족의 문화를 자랑스럽게 여겼고, 민족정신을 강조하는 학교였다. 3·1운동으로 학교가 폐쇄될 정도로 오산학교는 민족의 정신이 서린 곳이었다.

 

이런 곳에서 시인 백석은 민족의 삶과 미래를 시로써 표현하게 되고, 이중섭은 그림으로 표현하게 된다. 이중섭의 소 그림을 보면 무용총 수렵도나 고구려 벽화가 연상되는데, 시인 백석도 북방에 있는 이런 벽화들을 닮은 헤어스타일을 하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오산학교는 미술에서 문학에 이르기까지 민족정신을 강조하는 학교였다.

 

백석의 헤어스타일과 우리말 사랑, 그리고 이중섭의 소 그림에는 민족적인 우월한 감정이 들어 있다. 이중섭의 그림에는 사람과 같이 말을 하려는 소를 볼 수 있다. 이중섭은 소를 통해 한민족의 정체성을 표현하려고 하였다. 그는 해방이 되기 전에는 백석의 시 ‘북방에서’와 ‘북신’에서 영감을 받아 감정을 넣고자 했다.

 

이중섭의 소에서 백석의 향기 느끼기

 

‘아, 나의 조상은, 형제는, 일가친척은, 정다운 이웃은, 그리운 것은,

사랑하는 것은, 우러르는 것은, 나의 자랑은, 나의 힘은 없다

바람과 물과 세월과 같이 지나가고 없다’ (북방에서 中에서)

 

상실의 깊음으로 인해서 소 그림에 말 못할 슬픈 감정들을 깊게 그리게 된다.

 

‘나는 문득 가슴에 뜨끈한 것을 느끼며

소수림왕을 생각한다 광개토대왕을 생각한다’(북신 中에서)

 

‘북방에서’와 ‘북신’을 통해 이중섭은 고구려의 기상을 소꼬리를 치켜 올리는 표현으로 나타내게 되었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中에서)

 

이중섭은 아내와 헤어지면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 처한 상태가 자신의 상태라는 것을 공감하면서 소의 눈빛에 자신의 슬픔의 깊이를 집어넣었다. 그래서 그의 소 그림에는 눈빛이 사람과 같고, 말하고 싶은 슬픔이 가득 묻어 나오는 것이다.

 

이중섭의 소 그림에서 대부분의 소가 한쪽 얼굴만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궁금증은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중섭의 삶과 그림, 백석의 삶과 시를 비교하고, 당시 시대상들을 검토하면서 놀라운 점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백석의 얼굴과 헤어스타일을 상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백석은 사슴으로 불렸고, 항상 옆모습을 보이는 자세를 취하였다고 한다. 백석의 정면 사진이 많지 않다는 것은 시인 백석이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였고, 자신의 머리 형태에 담긴 돌 석(石)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다른 경우이지만 한번은 노리다께 가스오에게 한동안 흰 파를 들고 있는 행위를 보여주면서 흰 파를 볼 때마다 백석(白石)을 생각하라는 행동을 한 적이 있다. 이처럼 백석은 오산학교에서부터 이런 행동을 하여 오산학교 출신들은 백석의 고고함과 도도함, 일하는 모습, 특이한 자세와 행동으로 좌중을 압도하는 모습에 자부심까지 느끼곤 하였다.

 

그리고 이중섭이 소의 얼굴 전체를 그리지 않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백석의 시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에 담겨 있는데, 백석은 소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길을 걷다가 정육점이 나오면 외면을 하고 다른 길로 갔다고 하는데, 어떤 유혹과 시련이 와도 거기에 영향을 받지 않고 나의 길을 가겠다는 것을 소의 한쪽 얼굴을 통해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중섭은 이 시의 표현과 같이 콧수염을 길렀는데 이중섭이 백석의 시를 너무나 좋아하였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 이제 이중섭의 그림을 대할 때 두 사람의 정신적 교감을 생각하면서 본다면 이중섭의 그림에서 백석의 향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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