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일 / 이규리
도망가면서 도마뱀은 먼저 꼬리를 자르지요
아무렇지도 않게
몸이 몸을 버리지요
잘려난간 꼬리는 얼마간 움직이면서
몸통이 달아날 수 있도록
포식자의 시선을 유인한다 하네요
최선은 그런 것이예오
외롭다는 말 아무때나 쓰면 안 되겠어요.
그렇다 해서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아요
어느 때, 어느 곳이나
꼬리라도 잡고 싶은 사람들 있겠지만
꼬리를 잡고 싶은 건 아니겠지요
와중에도 어딘가 아래쪽에선
제 외로움을 지킨 이들이 있어
아침을 만나는 거라고 봐요
- 이규리 시집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문학동네시인선 054, 2014)
희망이라는 것 / 이규리
부레옥잠은 팔뚝에 공기주머니 하나 차고 있다
탁한 물에서도 살 수 있는 건
공기주머니 속에 든 희망 때문이다
가볍게 떠있던 물 속 시간들
희망이 꼭 미래를 뜻하는 건 아니지만
나도 팔뚝에 희망 하나 차고 다닌 적 있다
잊을 수 없는 일마저, 건널 수 없는 세상마저
그 속에 밀어넣었던 적 있다
그런 희망이 텅 빈 주머니란 걸
언제라도 터뜨려 질 수 있는 눈물이란 걸
나는 물랐을까
부레옥잠이 떠 있는 건
희망 때문이 아니다
속을 다 비워낸 가벼운 때문이 아니다
잎잎마다 앉은 한 채씩 승가람
그 자리는 서늘해서 누구나
바람 소릴 노래처럼 안고 가는데
옥잠이란 이름에 부리 하나 더 얹은
쓸쓸한 감투가 그의 이름이듯이
-이규리 시집 「앤디워홀의 생각」 (셰계사 , 2004) 중에서
뒷모습 / 이규리
어떤 스님이 정육점에서
돼지고기 목살 두어 근 사들고
비닐봉지 흔들며 간다
스님의 뒷목이 발그럼하다
바지 바깥으로 생리혈 비친 때처럼
무안한 건 나였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분홍색 몸을 가진 것
어쩌면 우리가 서로 만났을까
속세라는 석쇄 위에서 몇 차레 돌아누울
붉은 살들
누구에겐가
한 끼 허벅진 식사라도 된다면
기름 냄새 피울 저 물컹한 부위는
나에게도 있다
뒷모습은 남의 것이라지만
너무 참혹할까 봐 뒤에 두었겠지만
누군가 내 뒷모습 본다면
역시 분홍색으로 읽을 것이다
해답은 뒤에 있다
-이규리 시집 「뒷모습」(랜덤하우스, 2006) 중에서
폐허라는 것 / 이규리
허물어진 마음도 저리 아름다울 수 있다면
나도 너의 폐허가 되고 싶다
살아가면서 누군가에 한떼
폐혀였다는 것, 또는
폐허가 날 먹여 살렸다는 것.
어떤 기막힌 생이 분탕질한 페허에 와서
한판 놀고 가는 바람처럼
내 놀이는
지나간 흔적들 빼꼼히 들여다보는
쌈박한 도취 같은 것
콜로세움은 폐허가 아니었고
상처가 아니었고
먼 훗날 아들의 아들, 손자의 손자가
할애비의 놀이터를 구경하라고
날 무딘 칼로 뚜껓을 썰어 연
단
면
도
- 이규리 시집 「앤디워홀의 생각」 (세계사 ,2004 중에서
나무가 나무를 모르고 / 이규리
공원 안에 있는 살구나무는 밤마다 흠씬 두들겨맞는다
이튿날 가보면 어린 가지들이 이리저리 부러져 있고
아직 익지도 않은 열매가 깨진 채 떨어져 있다
새파란 살구는 매실과 매우 흡사해
으슥한 밤에 나무를 때리는 사람이 많다
모르고 때리는 일이 맞는 이를 더 오래 아프게도 할 것이다
키 큰 내갸 붙어다닐 때 죽자고 싫다던 언니는
그때 이미 두들겨맞은 거 아닐까
키가 그를 말해주는 것도 아닌데, 내가 평생
언니를 때린 건 아닐까
살구나무가 언니처럼 무슨 말을 하진 않았지만
매실나무도 제 딴에 이유를 남기지 않았지만
그냥 존재하는 것으로 한쪽은 아프고 다른 쪽은 미안했던 것
나중 먼 곳에서 어느 먼 곳에서 만나면
우리 인생처럼
그 나무가 나무를 서로 모르고
-이규리 시집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문학동네 시인선 054) 중에서
사막 편지 2 / 이규리
사막은 남성성을 지녔다. 잊을 만하면 돌아와 앞 섶을 여는 회오리, 사막이 우는 날은 내가 한없이 유순해진다. 비로소 너를 안을 수 있는 때이기도 하다. 평원의 한 곳, 모래를 파고 만든 내 방에 한번 와 보시라 나는 점점 단순해지고 방안엔 명호청보다 부드런 깔개만 하나 있다. 어떤 울음, 콜로라도 강줄기를 따라 갔던 여행자들 중 만의 하나 다시 이곳을 들르는 사람은 보겠지 내가 사막의 페니스를 물고 기꺼이 혼절하는 것들. 사막에서 재는 온도는 일생 중 가장 붉다. 그건 울음의 온도이다.
-이규리 시집 「앤디 워홀의 생각」(세계사, 2004)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