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수필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구름뜰 2017. 8. 17. 22:02

 

특별한 일  /  이규리


도망가면서 도마뱀은 먼저 꼬리를 자르지요

아무렇지도 않게

몸이 몸을 버리지요


잘려난간 꼬리는 얼마간 움직이면서

몸통이 달아날 수 있도록

포식자의 시선을 유인한다 하네요


최선은 그런 것이예오


외롭다는 말 아무때나 쓰면 안 되겠어요.


그렇다 해서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아요


어느 때, 어느 곳이나

꼬리라도 잡고 싶은 사람들 있겠지만

꼬리를 잡고 싶은 건 아니겠지요


와중에도 어딘가 아래쪽에선 


제 외로움을 지킨 이들이 있어

아침을 만나는 거라고 봐요


- 이규리 시집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문학동네시인선 054, 2014)






 


희망이라는 것 / 이규리


부레옥잠은 팔뚝에 공기주머니 하나 차고 있다

탁한 물에서도 살 수 있는 건

공기주머니 속에 든 희망 때문이다

가볍게 떠있던 물 속 시간들

희망이 꼭 미래를 뜻하는 건 아니지만

나도 팔뚝에 희망 하나 차고 다닌 적 있다

잊을 수 없는 일마저, 건널 수 없는 세상마저

그 속에 밀어넣었던 적 있다

그런 희망이 텅 빈 주머니란 걸


언제라도 터뜨려 질 수 있는 눈물이란 걸

나는 물랐을까

부레옥잠이 떠 있는 건

희망 때문이 아니다

속을 다 비워낸 가벼운 때문이 아니다

잎잎마다 앉은 한 채씩 승가람

그 자리는 서늘해서 누구나

바람 소릴 노래처럼 안고  가는데

옥잠이란 이름에 부리 하나 더 얹은

쓸쓸한 감투가 그의 이름이듯이


-이규리 시집 「앤디워홀의 생각」 (셰계사 , 2004) 중에서




 


뒷모습 / 이규리


어떤 스님이 정육점에서

돼지고기 목살 두어 근 사들고

비닐봉지 흔들며 간다

스님의 뒷목이 발그럼하다

바지 바깥으로 생리혈 비친 때처럼

무안한 건 나였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분홍색 몸을 가진 것

어쩌면 우리가 서로 만났을까

속세라는 석쇄 위에서 몇 차레 돌아누울

붉은 살들

누구에겐가

한 끼 허벅진 식사라도 된다면

기름 냄새 피울 저 물컹한 부위는

나에게도 있다

뒷모습은 남의 것이라지만

너무 참혹할까 봐 뒤에 두었겠지만

누군가 내 뒷모습 본다면

역시 분홍색으로 읽을 것이다

해답은 뒤에 있다


-이규리 시집 「뒷모습」(랜덤하우스, 2006) 중에서





 

폐허라는 것 /  이규리


허물어진 마음도 저리 아름다울 수 있다면

나도 너의 폐허가 되고 싶다

살아가면서 누군가에 한떼

폐혀였다는 것, 또는

폐허가 날 먹여 살렸다는 것.


어떤 기막힌 생이 분탕질한 페허에 와서

한판 놀고 가는 바람처럼

내 놀이는

지나간 흔적들 빼꼼히 들여다보는

쌈박한 도취 같은 것


콜로세움은 폐허가 아니었고

상처가 아니었고

먼 훗날 아들의 아들, 손자의 손자가

할애비의 놀이터를 구경하라고

날 무딘 칼로 뚜껓을 썰어 연





- 이규리 시집  앤디워홀의 생각 (세계사 ,2004 중에서



나무가 나무를 모르고 / 이규리


공원 안에 있는 살구나무는 밤마다 흠씬 두들겨맞는다

이튿날 가보면 어린 가지들이 이리저리 부러져 있고

아직 익지도 않은 열매가 깨진 채 떨어져 있다

새파란 살구는 매실과 매우 흡사해

으슥한 밤에 나무를 때리는 사람이 많다


모르고 때리는 일이 맞는 이를 더 오래 아프게도 할 것이다

키 큰 내갸 붙어다닐 때 죽자고 싫다던 언니는

그때 이미 두들겨맞은 거 아닐까

키가 그를 말해주는 것도 아닌데, 내가 평생

언니를 때린 건 아닐까


살구나무가 언니처럼 무슨 말을 하진 않았지만

매실나무도 제 딴에 이유를 남기지 않았지만

그냥 존재하는 것으로 한쪽은 아프고 다른 쪽은 미안했던 것

나중 먼 곳에서 어느 먼 곳에서 만나면

우리 인생처럼


그 나무가 나무를 서로 모르고


-이규리 시집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문학동네 시인선 054) 중에서





사막 편지 2 /  이규리


사막은 남성성을 지녔다. 잊을 만하면 돌아와 앞 섶을 여는 회오리, 사막이 우는 날은 내가 한없이 유순해진다. 비로소 너를 안을 수 있는 때이기도 하다. 평원의 한 곳, 모래를 파고 만든 내 방에 한번 와 보시라 나는 점점 단순해지고 방안엔 명호청보다 부드런 깔개만 하나 있다. 어떤 울음, 콜로라도 강줄기를 따라 갔던 여행자들 중 만의 하나 다시 이곳을 들르는 사람은 보겠지 내가 사막의 페니스를 물고 기꺼이 혼절하는 것들. 사막에서 재는 온도는 일생 중 가장 붉다. 그건 울음의 온도이다.


-이규리 시집 「앤디 워홀의 생각」(세계사, 2004)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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