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전쟁의 가해자였다. 그들은 아시아를 유린한 것에 그치지 않고 진주만을 공격했다. 결국 그것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핵 투하로 이어졌다. 하늘에서 죽음이 내려오면서 20만 명 이상의 사람이 죽었다. 민간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일본 스스로가 불러들인 참사라는 인식 탓에 미국 대통령들은 현직에 있을 때 아무도 히로시마를 찾지 않았다. 사과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흑인인 오바마 대통령은 달랐다. 과감했다.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그가 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던 트럼프의 캠프로부터 ‘참전용사들을 디스한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히로시마를 찾은 이유다.
그는 “폭탄이 떨어진 순간을 상상해보고”, “아이들이 느꼈을 두려움을 느껴보자”고 했다. 그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을 들어보자”고 했다. 그는 희생자 중 상당수가 한국인이었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의 말에는 호소력이 있었다. 그는 미국인들의 정서를 의식해 ‘사과’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말에 사과의 마음을 담았다. 하늘에서 죽음이 내려온 지 71년 만이었다.
섬뜩한 종말을 환기시키는 묵시록적인 문장으로 시작된 연설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비극을 ‘도덕적 각성의 시발점’으로 삼아 평화로운 미래를 열자는 문장으로 끝났다. 이슬람 공동체를 대상으로 한 카이로 연설만큼이나 감동적인 연설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연설이 계속되는 17분여 내내, 숙연한 모습으로 그의 옆에 서 있던 아베 신조 총리를 한없이 초라하고 왜소하게 만들었다. 자신들이 유린한 이웃 나라들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사과조차 하지 않으려 하는 그이기에 그랬다. 자신들이 유발한 이웃 나라들의 상처 앞에서 더 숙연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거나 애써 외면하는 그이기에 그랬다. 죽음이 내려와도 누군가는 그리 쉽게 도덕적 각성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 이것이 묵시록의 역설이자 존재 이유다. 우리도 때로는 예외가 아니다.
왕은철 문학평론가·전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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