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는 숲에서 글을 구상했다.
‘일찍이 서산대사가 살았을 듯한 우거진 송림 속, 게다가 덩그러니 살림집은 외따로 한 채뿐’(‘종시’)이라고 할 만치 연희전문 핀슨홀 기숙사는 숲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지금도 연세대에는 청송대라는 작은 숲이 있다. 숲과 화원은 그의 상상력을 잉태하는 종요로운 공간이었다.
나는 이 귀한 시간을 슬그머니 동무들을 떠나서 단 혼자 화원을 거닐 수 있습니다. 단 혼자 꽃들과 풀들과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습니까.(‘화원에서 꽃이 피다’)
꽃과 풀과 대화했던 그에게는 나무도 귀한 대화 상대였다. 연희전문에 입학하기 전 그의 글에도 나무는 등장한다. ‘나무 가지 위에 하늘이 펼쳐 있다’(‘소년’), ‘눈 내리는 저녁에 나무 팔러간/우리 아빠 오시나 기다리다가’(‘창구멍’) 등에서 나무는 늘 그의 곁에 있다.
나무가 춤을 추면
바람이 불고,
나무가 잠잠하면
바람도 자오
― ‘나무’(1937년 3월)
이상하지 않나. 사실 바람이 불면 나무가 춤을 추고, 바람이 자면 나무가 잠잠해야 하지 않는가. 동주는 거꾸로 생각한다. 원인과 결과가 바뀌어 있다. 바람이 아니라 나무가 세상의 중심이며 주인이란다. 내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내가 정신없으면 만사가 난리고, 내가 태연하면 만사가 잘된다는 식으로 볼 수도 있겠다.
관점을 바꾸면 세상은 다르게 보인다. 우리 집에는 닭도 없는데, ‘다만 애기가 젖 달라 울어서 새벽이 된다’, 우리 집에는 시계도 없는데 ‘다만 애기가 젖 달라 보채어 새벽이 된다’(‘애기의 새벽’)고 한다. 닭이나 시계 대신 새벽을 끌어오는 이 ‘애기’야말로 바람을 춤추게 하고 잠잠케 하는 나무, 곧 강력한 단독자 아닌가.
동주가 좋아했던 ‘맹자’에 나오는 대장부(大丈夫)도 나무랑 비슷하다. 세상에서 큰 도를 행하며(行天下之大道), 가난하거나 천해도 마음을 바꾸지 않는(貧賤不能移) 대장부야말로 나무와 비슷하다. 광명중학교 시절 습작노트 ‘나의 습작기의 시 아닌 시’ 뒤표지 안쪽에 적힌 메모, 3·4·5조가 반복되는 빈틈없는 ‘나무’는 이토록 많은 생각을 이끈다. 윤동주는 나무에 대한 짧지 않은 묵상을 남겼다.
나무가 있다.
그는 나의 오랜 이웃이요 벗이다.
나는 처음 그를 퍽 불행한 존재로 가소롭게 여겼다. 그의 앞에 설 때 슬퍼지고 측은한 마음이 앞을 가리곤 하였다. 마는 돌이켜 생각건대 나무처럼 행복한 생물은 다시없을 듯하다. 굳음에는 이루 비길 데 없는 바위에도 그리 탐탁지는 못할망정 자양분이 있다 하거늘 어디로 간들 생(生)의 뿌리를 박지 못하며 어디로 간들 생활의 불평이 있을쏘냐. 칙칙하면 솔솔 솔바람이 불어오고, 심심하면 새가 와서 노래를 부르다 가고, 촐촐하면 한줄기 비가 오고, 밤이면 수많은 별들과 오손도손 이야기 할 수 있고
― ‘별똥 떨어진 데’(1939년)
연희전문학교 교정 인근 연희숲에서 학우들과 기념사진을 찍은 윤동주(가운데).
윤동주에게 나무는 오랜 이웃이고 벗이다. 사실 그는 자신을 나무에 비유하고 있다. ‘퍽 불행한 존재로 가소롭게 여겼’던 것은 그 자신일 수도 있겠다. 측은해 보이던 자신은 나무를 보고 행복의 의미를 깨닫는다. ‘칙칙하면 솔솔 솔바람이 불어오고…밤이면 수많은 별들과 오손도손 이야기’하는 나무의 일상은 행복 자체다. 나무는 세상과 대립되어 있는 명령자가 아니다. 세상과 더불어 움직이는 존재다. ‘나무가 잠잠하면/바람도 자오’라는 구절처럼 내 마음이 태연하면 세상도 평안하다. 나무가 행복한 이유는 인용문 아래 이어 나온다.
‘보다 나무는 행동의 방향이란 거추장스런 과제에 봉착하지 않고 인위적으로든 우연으로서든 탄생시켜 준 자리를 지켜 무진무궁(無盡無窮)한 영양소를 흡취(吸取)하고 영롱한 햇빛을 받아들여 손쉽게 생활을 영위(營爲)하고 오로지 하늘만 바라고 뻗어질 수 있는 것이 무엇보다 행복(幸福)스럽지 않느냐.’
흔히 윤동주를 나약하고 감성적인 청년으로 생각하지만, 그의 시를 대여섯 번 읽으면 영혼의 힘줄에 이상한 탄력이 부푼다. 그 마음이 열매의 씨처럼 단단하다는 것을 친구 유영(전 연세대 교수)이 잘 증언했다.
“누구도 어찌 못할 굳고 강한 것이었다. 문학에 지닌 뜻과 포부를 밖으로 내비치지 않으면서 안으로 차근차근 붓을 드는 버릇이 있었다. 동주는 말이 없다가도 이따금 한마디씩 하면 뜻밖의 소리로 좌중을 놀라게 했다.”
-김응교 시인·숙명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