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서가 없다
늙음도 하나의 가치라고
실패도 하나의 성과라도
어느 시인은
기막힌 말을 하지만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마음을 잡아야 한다고
어느 선배는
의젓하게 말하지만
마음은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것
마음은 잡아도 잡아도 놓치고 마는 것
너무 고파서 너무 놓쳐서
사랑해를 사냥해로 잘못 읽은 사람도 있다고
나는 말하지만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다는 점에서
고통은 위대한 것이라고
슬픔앞에서는 누구도 이길 수 없는 것이라고
다시 어느 시인은
피같은 말을 하지만
모르는 소리마라
몸 있을 때까지만 세상이므로*
삶에는 대체로 순서가 없다
* 황지우 시에서
나의 처소
말굽소리 사라지고 남은 들길을 옮겨가고 있다
고삐도 없이 안장도 없이
세월 위에 무엇을 얹으려는듯
오래전 나를 비켜간 풍경을 지우고
말없는 들에 손을 얹어본다
그까짓 잡풀같은 거 들풀같은 거
확 잡아채 멀리 던진다
들판이 아니었으면 바람의 내력을 풀지 못했으리
바람이 내게 풍물(風物) 하나를 가르치고 갔다
눈앞에 수락야산 동쪽벼랑, 어디가
조금 평평해진 것도 같다
마들은 도무지 정상을 모른다
모서리도 벼랑도 없는 들길에 서서
제 키를 그들로 낮춘 나무를 본다
저 나무는
평생 누워있던 들이 지루함을 견디다 못해
벌떡 일어선 게 아닐까
일어서서 중심을 고집한 게 아닐까
생각해보니 수직이 없는 들에는 그늘이 빠져 있다
말의 발자국 거기서 끊겨 있다
끊어진 것은 끊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들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
오늘은 내가 번개라도
돌을 쪼개듯 들을 쪼갤 수는 없다
그러니 들이여, 내가 원한 것은
호곡장(好哭場)인 나의 처소
부재(不在)
뿔피리 소리가 온 마을에 퍼질 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나요
짐승들이 먼 기억을 향해 머리를 들때 그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나요
뿔피리 소리가 길게 한번 짧게 세 번 울려 펴질때 당신은 또 어디에 있었나요
그 소리 퍼져 마을이 깨어날 때 당신은 다시 어디에 있었나요
짐승들이 제 자리에 쭈그리고 앉은 채 긴 금색 털을 햇살에 빛나게할 때 당신은 또, 또 어디에 있었나요
대지 위에 박힌 조각처럼 꼼짝도 않고 머리를 쳐든 채 하루의 마지막 빛이 사과밭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당신은 계속 어디에 있었나요 해가 기울고 빛의 파란 어둠이 몸을 뒤덮으면 짐승들이 머리를 떨어뜨려 하얀 한가닥 뿔을 바닥에 내리고 눈을 감을 때 당신은 정말 어디에 있었나요 더 이상 뿔피리소리 들리지 않고 마을도 눈을 감을 때 오직 당신은 어디에 있었나요 오, 눈앞의 어둠같은, 어둠같은 눈앞의 저쪽에도 없는 당신
다행이라는 말
환승역 계단에서 그녀를 보았다 팔다리가 뒤틀려 온전한 곳이 한 군데도 없어 보이는 그녀와 등에 업힌 아기. 그 앞을 지날 때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돈을 건넨 적도 없다 나의 섣부른 동정에 내가 머뭇거려 얼른 그곳을 벗어났다 그래서 더 그녀와 아기가 맘에 걸렸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궁금했는데 어느 늦은 밤 그곳을 지나가 또 그녀를 보았다 놀라운 일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녀가 바닥에서 먼지를 툭툭 털며 천천히 일어났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흔들리지도 않았다 자, 집에 가자 등에 업힌 아기에게 백년을 참다 터진 말처럼 처음 입을 열었다 가슴에 얹혀있던 돌덩이 하나가 쿵, 내려앉았다 놀라워라! 배신감보다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비난하고 싶지 않았다 멀쩡한 그녀에게 다가가 처음으로 두부사세요 내 마음을 건넸다 그녀가 자신의 주머니에 내 마음을 받아넣었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 따뜻한 밥을 짓고 국을 끓여 아기에게 먹일 것이다 멀어지는 그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뼈속까지 서늘하게 하는 말, 다행이다.
오래된 농담
회화나무 그늘 몇평 받으려고
언덕길 오르다 늙은 아내가
깊을 숨 몰아쉬며 업어달라 조른다
합환수 가지 끝을 보다
신혼의 첫 밤을 기억해낸
늙은 남편이 마지못해 업는다
나무그늘보다 몇평이나 더 뚱뚱해져선
나, 생각보다 무겁지? 한다
그럼, 무겁지
머리는 돌이지 얼굴은 철판이지 간은 부었지
그러니 무거울 수밖에
굵은 주름이 나이테보다 더 깊어보였다
굴참나무 열매 몇되 얻으려고
언덕길 오르다 늙은 남편이
깊은 숨 몰아쉬며 업어달라 조른다
열매 가득한 나무 끝을 보다
자식농사 풍성하던 그날을 기억해낸
늙은 아내가 마지못해 업는다
나무열매보다 몇알이나 더 작아져선
나, 생각보다 가볍지? 한다
그럼, 가볍지
머리는 비었지 허파에 바람들어갔지 양심은 없지
그러니 가벼울 수밖에
두 눈이 바람잘 난 없는 가지처럼 더 흔들려 보였다
농담이 나무그늘보다 더더 깊고 서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