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수필

괴물 / 최영미

구름뜰 2018. 2. 7. 09:16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  
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K의 충고를 깜박 잊고 En선생 옆에 앉았다가  
Me too  
동생에게 빌린 실크 정장 상의가 구겨졌다
 
몇 년 뒤, 어느 출판사 망년회에서  
옆에 앉은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En을 보고,  
내가 소리쳤다  
"이 교활한 늙은이야!"  
감히 삼십년 선배를 들이받고 나는 도망쳤다
En이 내게 맥주잔이라도 던지면  
새로 산 검정색 조끼가 더러워질까봐  
코르자락 휘날리며 마포의 음식점을 나왔는데,  
 
100권의 시집을 펴낸  
"En은 수도꼭지야. 틀면 나오거든
그런데 그 물은 똥물이지 뭐니"
(우리끼리 있을 때) 그를 씹은 소설가 박 선생도

En의 몸집이 커져 괴물이 되자 입을 다물었다
 
자기들이 먹는 물이 똥물인지도 모르는  
불쌍한 대중들
 
노털상 후보로 En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En이 노털상을 받는 일이 정말 일어난다면,  
이 나라를 떠나야지
이런 더러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
 
괴물을 키운 뒤에 어떻게  
괴물을 잡아야 하나   
    

 계간 황해문화2017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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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 / 1961년 서울 출생. 서울대 서양사학과와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 1992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꿈의 페달을 밟고』『돼지들에게』『도착하지 않은 삶』『이미 뜨거운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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