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안동에서 대구로 복귀 발령을 받은 날, 찾은 곳이 있다. 예천군 지보면 대죽리 한대마을의 언총(言塚)이다. 말(馬)의 무덤이 아니라, 말(言)을 묻은 곳이다. 우리 조상들은 참 신박하다. 묻을 수 없는 '말'을 묻고, 그것을 '언총'이라 불렀으니.
언총은 400여 년 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마을은 예부터 각성바지들이 살던 곳. 사소한 말 한마디가 씨앗이 돼 문중 간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다. 마을 어른들이 해결책을 모색했다. 여기서도 전설의 단골 캐릭터 '나그네'가 등장한다.
나그네가 제안한 해법은 쾌도난마(快刀亂麻). 마을을 둘러싼 야산이 개가 짖는 모습과 비슷해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래서 ▷싸움의 발단이 된 거짓말 ▷상스러운 말 ▷가슴에 상처가 되는 말 등을 사발에 모아 구덩이에 묻으라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의 말대로 했다. 이후 마을은 평화로워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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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총 주변을 거닐다가 눈이 번쩍 뜨였다. 큰 돌에 '혀 밑에 죽을 말 있다'는 속담이 새겨져 있었다. 말을 잘못하면 재앙이 되니, 말조심하라는 뜻이다. 얼음을 깨는 도끼 같은 경구가 널려 있었다. '웃느라 한 말에 초상난다' '화살은 쏘고 주워도 말은 하고 못 줍는다' '말 뒤에 말이 있다' '가루는 칠수록 고와지고 말은 할수록 거칠어진다'…. 저절로 묵언수행(默言修行). 우리는 말로써 얼마나 많은 죄업을 지었던가.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또 고개를 숙였다. 1년 전 자신이 뱉은 말에 대해 사과했다. 그는 22일 '수사기관이 노무현재단 계좌를 들여다봤다'고 주장한 자신의 의혹 제기는 사실이 아니었다며 사과문을 발표했다. 유 이사장은 사과문에서 "저는 제기한 의혹을 입증하지 못했다. 사실이 아닌 의혹 제기로 검찰이 저를 사찰했을 것이라는 의심을 불러일으킨 점, 검찰의 모든 관계자들께 정중하게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또 "과도한 정서적 적대감에 사로잡혔고 논리적 확증편향에 빠졌다"고 했다.
유 이사장의 갑작스러운 사과는 검찰 수사 때문일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노무현재단 홈페이지에는 충격과 혼란을 표현하는 댓글이 잇따랐다.
2019년 12월 유 이사장은 노무현재단 유튜브 채널 '알릴레오'에서 "검찰이 노무현재단 은행 계좌를 들여다봤다"고 주장했다. 또 "내 개인 계좌도 들여다봤을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했다. 지난해 7월에도 유 이사장은 "한동훈 검사가 있던 대검 반부패강력부 쪽에서 봤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유 이사장의 '확증편향'은 한두 번이 아니다. 조국 사태 때는 궤변이 상상을 초월했다. 유 이사장은 정경심 교수의 증거인멸 행위를 '증거보전'이라고 우겼다. 검찰의 '증거조작'을 전제한 발언이다. 혹세무민(惑世誣民)이 따로 없다. 또한 당시 최성해 동양대 총장에게 회유성 전화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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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이사장은 진보 진영의 유력 인사다. 화려한 언변과 글솜씨로 두터운 팬덤을 확보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을 믿고 따른다. 그의 말이 진중해야 할 이유다. 그런데도 그는 사회적 대립과 갈등을 부추기는 말들을 쏟아냈다.
비단, 유 이사장만이 아니다. 근거 없는 폭로와 음모론이 활개 치고 있다. 정치인은 지지자를 결집하기 위해, 유명인은 관심을 끌기 위해 허튼소리를 하고 있다. 이들의 발언은 확증편향을 증폭시킨다. 자기 편이 아니면 기자는 기레기, 검사는 검레기, 판사는 판레기로 매도된다.
부디, 몹쓸 말들은 '말무덤'에 묻어두길 바란다. 이참에 코로나 사태로 막힌 국회의원 해외 연수를 '예천 말무덤 연수'로 대체하면 어떨까.
ㅡ매일칼럼 김교영 ㅡ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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