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향기

늙은호박

구름뜰 2025. 12. 7. 09:00


호박이 왔다 귀인처럼
선 굵은 남성적인 것과
아담해서 아직은 어린것 같은 두 덩이가

서른 살 무렵 초겨울 이맘때였다
밭어귀 여기저기서 보물찾기 하듯 호박을 수확하는 어머님을 보면서
애호박과는 수확시기에 따른 거란 걸
비바람 고스란히 품은 늙음은
주인만 아는 곳에 자리해서
나그네 눈에는 띄지도 않던

그 호박을 가져와 겨우내
어쩌지 못하다가 썩혀버린 일
이후로 나는 엄두도 나질 않았고
인연을 만들지도 않았었는데


고향이 다른 두 곳에서
농사도 짓지 않는 이와
농사지은 이가 경비실까지 다녀가셨다

유튜브를 검색해 보고
충분히 어찌해 볼 줄 알고 싶어졌다
바늘도 안 들어갈 것 같던 껍질에 비해
속은 삶으니 스르르 풀어졌다
호박씨는 또 얼마나 많은지
외강내유다 금실 좋은 부부처럼

팥을 불리고 삶고 찹쌀가루도 더하고
호박범벅을 만들었다
혼자보다 함께 먹고 싶은 뜨거움이다

내가 다니는 요가원 회원들은
호박만 생기면 들고 오던 때가 있었다.
팥죽을 먹고 싶으면 팥을 가져오기도 했다
우렁각시처럼 먹이는 것을 좋아하셨던 회원언니는 다음날이면 찜통 가득 죽을 해오셨다
덕분에 우린 겨울을 얼마나 따뜻하게 보냈는지

겨울은 돌아왔지만
인연은 오기도 하고
가고는 아니 오기도 한다
그리운 것은 언제나 지난 다음이 되고
오늘의 그리움이
오늘의 풍경이라면 더 사람 했을까


호박을 받고 호박 요리를 해보니 알겠다
늙은 호박 한 덩이는
늙은 호박 한 덩이만은 아니라는 걸
ㅡ 25년 초겨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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