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뽑은 작가의 책

김중혁-심보선 [슬픔이 없는 십오 초]

구름뜰 2009. 3. 25. 23:29

 [작가가 뽑은 작가의 책 ⑥ 김중혁 → 심보선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중앙일보]

이런 게 시였지, 노래였지
한동안 시를 잊고 살던 내게 한순간에 되살려준 시의 기억

대중문화

논쟁중인 댓글 (0)

 요즘에도 사람들이 시를 읽나? 모르겠다. 나는 한동안 시를 잊고 살았다.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요즘에도 사람들이 시를 쓰나?’라는 생각도 하지 않을 만큼 무관심했다. 살다 보면 그렇다더라. 생각해 보면 노래도 잘 듣지 않았다. 예전에는 시디의 플라스틱 케이스 뒷면에다 네임펜으로 별을 매겨가며 음악을 들었는데, 마음에 드는 노래는 따로 잘 모아뒀다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녹음 선물도 했는데, 이젠 다 시들시들하다. 역시 살다 보면 그런가 싶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시와 노래를 즐기고 있을 정신이 없었던 걸까. 짧은 순간 한눈을 팔았다고 생각했는데, 엇, 이만큼이나 빨리, 이만큼이나 멀리 지나왔다. 시와 노래 없이 어떻게 지냈던 걸까.

김중혁씨는 카투니스트이자 사진 실력도 빼어나다. 개인 홈페이지 (www.penguinnews.net)에서 그의 다양한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김상선 기자]

최근 나를 시의 세계로 돌아오게 한 시집이 『슬픔이 없는 십오 초』다. 시집을 읽다가 나는 깜짝깜짝 놀랐다. 날카로운 시 속의 말들이 내 전두엽을 찔렀다. 이런 게 시였지, 노래였지, 말은 이렇게 아름답고, 언어는 이렇게 날카롭고, 운율은 차곡차곡 쌓여 매끈하고, 의미는 곁가지로 무성한, 이런 게 바로 시였지, 노래였지, 예전의 기억들이 전부 되살아났다. 나는 방에 누워 시를 읽었다. (역시 시와 노래는 소리 내어 읽어야 맛) 자, 이제 방바닥에 드러누워 함께 읽어 보아요.

(전략) ‘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기까지 읽다가 나는 내 맘대로 한 구절을 반복한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텅 빈 방안에서 그 말은 메아리 같다. 방바닥에 드러누워 시를 마저 읽었다. 마지막 대목이 좋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나는 시집을 내 가슴팍에 얹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노래를 부르고 난 느낌이다. 형광등 때문에 눈이 맵다. 시의 메아리가 보이는 것 같다. 시집에는 56편의 시가 들어 있다. 몇 편은 아름답고, 몇 편은 슬프고, 몇 편은 웃기(기까지 하)다. 모두 좋다고 과장하고 싶을 만큼 좋다.

나는 심보선 시인을 잘 모른다. 몇 번 만난 적도 있고, 얘기도 나눈 적이 있지만, 잘 모르겠고, 잘 모른다(사람을 안다는 게 뭘까). 그래도 ‘꽃이 성급히 피고 나무가 느리게 죽어가는 이유./ 뭐, 그렇고 그런, 그러나,/ 일순 장엄해지는/ 찰나의 무의미./ 혹은/ 무의미의 찰나’와 같은 문장을 쓰는 사람이라면 그동안 알고 지낸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런 그가 어떤 책을 추천할지, 그것도 궁금하다.

◆『슬픔이 없는 십오 초』(2008, 문학과지성사)=심보선 시인이 등단 14년 만에 펴낸 첫 시집. 해설을 쓴 평론가 허윤진씨는 “심보선의 시집은 그 자체로 슬픔을 저축해 가는 과정”이라고 했다. 눈물 뚝뚝 흐르거나 통곡하는 슬픔이 아니다. 남들보다 예민하기에 더 아프게 감지하는 일상의 사소한 슬픔이 차곡차곡 쌓여 빚어 내는 무늬다. 



◆김중혁=음악·그림·스포츠·영화·전자제품 등 관심사가 다양하다. 소문난 수집광이기도 하다. 그런 면모가 작품에도 녹아 들어 있다. 1971년생으로 ‘김천 3인문(三人文)’으로 통하는 문인 김연수·문태준과 중학교 동기동창이다. 계명대 국문과 졸업. 2000년 ‘문학과사회’로 등단했다. 소설집 『펭귄뉴스』와 『악기들의 도서관』이 있으며 2008년 단편 ‘엇박자 D’로 김유정문학상을 수상했다.

사진=김상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