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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보선 시인은 “‘홍콩 아트 페스티벌’을 보기 위해 홍콩에 열흘을 머물렀다”고 말했다. 그가 홍콩에 가져간 유일한 한국책이 강정의 시집이었다. [심보선 제공] | |
강정의 이전 시집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도 비슷한 이유로 인상에 남는다. 그 시집은 내가 귀국해서 첫 번째로 골라든 시집이었다. 나는 모국어가 그리도 낯설고 기괴할 수 있다는 데 충격을 받았다. 그의 시를 통해, 나는 서울이라는 최첨단 도시 아래 웅크리고 있는 온갖 희귀 짐승들의 살과 뼈를 생생히 촉감할 수 있었다. 그때, 가슴에 뭉클 솟아오르던 질투심이란! 그 질투심은 참으로 오랜만에 시인으로서의 자의식을 내게 일깨워줬다. 그는 내게 묻는 듯했다. 너는 돌아왔다. 그런데 너는 여전히 시인인가?
우연하게도 이행의 경험들-낯선 나라로의 여행과 8년 만의 귀국-과 겹치면서 강정의 시는 내게 이런저런 난감한 질문들을 던진다. 사실 그런 종류의 질문들은 좀 괴팍한 것들이어서 사람들을 세상과 겉돌게 만든다. 내가 “겉돈다”라고 평범하게 말할 때, 강정은 “인간이 인간 바깥으로 떠돌아” 다닌다고 멋지게 말한다. 나는 생각한다. 인간이 인간 바깥으로 떠돌려면 유령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유령인 우리는 어떻게 관계를 맺고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가?
강정은 우리가 유령임을 일깨우는 데 그치지 않는다. 역시 괴팍하게도, 그는 병도 주고 약도 준다. 그는 유령과 유령이 교감할 수 있는 비밀을 넌지시 알려준다. 유령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건네지 않듯, 강정의 시는 쉬운 메시지를 전하지 않는다. 강정의 시에 머리로 접근하려 하면, 그의 언어는 대개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고 가끔은 꼬리를 살랑대며 달아난다. 그렇다면 그의 시는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접근해야 한다. 나는 그의 시에 내 몸을 슬쩍 내어준다. 그러면, 놀라워라, 그의 시는 내 살 속으로 은근하게 스며들기 시작한다.
강정의 『키스』를 읽을 때 나는 그의 시구들이 어느새 살갗 바로 아래에서 꿈틀거리고 있음을 발견한다. 내 “몸 안의 분명한 외계”, 이상한 이물감, 섬뜩한 애무의 촉감을 느끼고 있자면, 나는 이 소통불능의 유령 도시에서도 사랑은 영원하리라는 낭만적 감상에 빠져든다. 그의 말대로 “낯설어진 몸 안으로 스며온 봄은/전 생애를 통과해나간 기억보다 밝고 길”기 때문이리라.
◆심보선=지식인의 고뇌와 유머를 겸비한 시인. 가령 그의 시 ‘나를 환멸로 이끄는 것들’에선 ‘태양’ ‘옛 애인들(가나다순)’ ‘칸트의 물(物) 자체’ ‘물 자체라는 말 자체’ 등이 시행을 구성했다.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사회학과 및 동 대학원을 거쳐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9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2008)가 있다. 2008년 미당문학상 최종심 후보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