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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은 세월이 지나 무르익으면 직설이 되어도 아무런 하자가 없다. 문학, 특히 한국문학을 국악처럼 여기는 요즘의 젊은이들에게는 낯설기만한 소리겠으나, 한글로 씌어진 소설을 비로소 예술로 대하려는 이들에게 오정희는 피할 수 없는 통과의례이자 새로운 장르였다. 분명히 그러한 시절이 있었고 오늘 여기 있는 바로 내게 오래 전 오정희는 그러하였다. 사정이 그 지경이면 한 작가는 누군가에게 있어 열중했던 문학만이 아니라 그 삶의 배후가 되어버린다.
누군가에게 하루키가 태양이 뜨거운 해변인 것처럼 내게 오정희는 눈내리는 밤의 흐릿한 골방이다. 나는 거기서 극약을 핥듯 오정희를 되풀이해 읽으며 20대 초반을 보냈다.
일상적이고 사적인 소재를 짧게 쓴 글을 ‘소품’이라 한다. 문학적 완성도가 떨어지는 자질구레한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이응준씨는 “오정희 선생의 『돼지꿈』이 소품인 줄 알았는데 읽어보니 아니더라”고 말했다. [이응준 제공] | |
산문시 같은 소설들이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여백이 많은 것들을 말해주고 있는데, 주절주절 늘어놓기를 부질없어 하는 작가의 결벽이 단어와 단어의 결마다 매섭게 숨어 있다. 세상의 이치를 통달해 요망해지느니 차라리 은은한 독설가가 되고 말겠다는 노장의 의지가 예리하다.
실은 고통에 헉헉 숨이 막히는 자가 스스로를 평범함으로 위장할 때 이렇듯 고요한데 섬뜩한 이미지들, 이러고도 사는 게 무섭지 않느냐는 통찰들이 문득문득 튀어나온다. 일상의 풍경 속에서 마성의 장면들을 골라 도려내는 솜씨는 연륜이 간섭하는 재능이 아니라 불온한 고해성사에 가깝다.
오정희의 캐릭터들은 사건의 실마리를 풀거나 뭔가를 깨달았다고 해서 쉽게 주변과 화해한다던가 자신을 용서하지 않는다. 저들 속에는 아직도 그녀의 초기 소설들 속을 뛰어다니던, 그 맹랑한 혼돈에 사로잡혀 있던 한 소녀가 도사리고 있다.
또한 모든 관계들에서 묘한 치정의 냄새가 나는데, 그것은 심지어 멀쩡한 부부라든가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서조차 예외가 아니다. 하긴 문학이란 삶에 대한 치정인지도 모른다. 인간이라는 짐승을 통해 삶이라는 치정을 이야기하고 있는 이 책은 아담하고도 기이한 우화가 맞다. 내가 오정희를 더 읽고 싶은 것은 치정으로 가득한 내가 아직도 고결한 추억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돼지꿈』(2008, 랜덤하우스)=등단 40주년을 맞은 소설가 오정희의 우화소설집이다. 사보 등의 매체에 짬짬이 발표해온 짧은 이야기 25편을 모았다. 대개 아내이자 엄마로 살아온 여성들이 주인공이다. 겉으론 고요하지만 속으론 높이 파도쳤다 이내 잠잠해지는 여성의 내면을 예리하게 잡아낸다.
◆이응준=1970년생 서울내기 소설가이자 시인이다. 90년 ‘문학과비평’을 통해 시로 먼저 등단한 뒤 94년 계간 ‘상상’으로 소설 데뷔했다. 시집 『나무들이 그 숲을 거부했다』 『낙타와의 장거리 경주』와 소설집 『달의 뒤편으로 가는 자전거 여행』 『내 여자친구의 장례식』, 장편 『느릅나무 아래 숨긴 천국』 『전갈자리에서 생긴 일』 등이 있다. 통일 한국의 미래를 상상해 쓴 장편 『국가의 사생활』이 민음사에서 곧 출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