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핫이슈
한마디로 그의 소설들은 ‘칼’이고 ‘풀’이다. ‘칼’과 ‘풀’은 벌써 30여 년 전부터 상처받기 쉬운 나의 자의식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해온 말인데, 김숨의 ‘투견’을 읽을 때, 나는 단층이 심한 이 두 개의 이미지가 내 작품들에서보다 그의 작품 속에서 더 강렬하고 더 미학적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의 소설을 읽으며 다치지 않을 수 있는 길을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야수적인 폭력성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그의 ‘칼’은 너무 예리해서 읽을 때 때로 숨이 멈춰지고, 너무 미학적이어서 때로 큰 창자 작은창자 안벽을 면도날이 긁고 가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우리가 세계 자본주의 안락과 효율에 기대 살지만, 기실 그것이 얼마나 야만적인 폭력을 교묘하게 포장하고 있는지 그는 예민하게 수신하고 가차없이 포착해낸다. 그의 ‘칼질’이 한없이 여리고 맑은 식물성의 ‘풀’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가령 ‘투견’에서, 초복을 앞두고 매일 여러 마리의 개들이 도살되는 장면에 이르러, ‘목이 졸리고 온몸이 까맣게 그슬린 채, 개들이 싸지른 오줌과 낭자하게 흘린 피’ 옆에 ‘흐드러지게’ 피는 감꽃과 뚝뚝 떨어져 깨지고 마는 ‘붉은 홍시’를 배치한 장면을 보라. 그의 ‘칼’과 ‘풀’이 문명비판을 넘어서 심층에 담긴 인간 본질을 뛰어난 미학적 수준으로 견인해 올리는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최근에 책을 낸 장편 『철』(문학과지성사)도 그렇다. 그는 2000년대 한국문학의 트렌드와 일정하게 거리를 두면서도, 1990년대 한국문학이 작품 안에서 유기했던 본원적인 문제들을 소설이 결국 예술이라는 것을 최종적으로 상기시키는 단단하고 끔찍하게 아름다운 그릇 안에 담아내고 있다. 나는 앞으로도 김숨의 새 소설을 누구보다 먼저 읽는 첫 번째 독자가 되고 싶다.
◆박범신=1946년 충남 논산 출생. 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여름의 잔해’가 당선돼 등단했다. 93년 한 일간지에 소설을 연재하던 중 절필을 선언하고 96년 중반까지 칩거하다 ‘문학동네’에 중편 ‘흰 소가 끄는 수레’를 발표하며 다시 글쓰기를 시작했다. 장편 『토끼와 잠수함』『죽음보다 깊은 잠』『불의 나라』『물의 나라』『침묵의 집』 등. 문단작가 최초로 인터넷 연재소설 『촐라체』 를 발표했다. 대한민국문학상·김동리문학상·만해문학상·한무숙문학상 등을 받았다. 현재 명지대 문예창작과 교수, 서울문화재단 이사장.
◆『투견』(문학동네, 2005)=젊은 여성 작가군에서 발군인 소설가 김숨(35)의 소설집. 개를 잡아 보신탕집에 납품하는 아버지가 잔혹하게 도살하는 장면을 볼 때마다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나’의 시선으로 참혹한 풍경을 그려낸 ‘투견’을 비롯해 모두 10편의 단편이 담겼다. 잔혹하고 그로테스크한 세계에서 미학을 끄집어내는 작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