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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 김숨 [투견]

구름뜰 2009. 5. 11. 21:41

피해갈 수 없다, 저 예리한 칼날

 작가들은 일반적으로 자의식이 강한 편이기 때문에 다른 동료작가들의 작품을 마음놓고 칭찬하기 쉽지 않다. 객관적 관점으로 보면 남다른 작품인데 주관적 관점으로 보면 싫은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김숨에 대해 쓰기로 작정하고 났더니, 단번에 뿌듯해진다. 김숨의 작품은, 객관적 소설미학의 관점과 나의 내밀한 주관적 관점이 서로 상반되지 않고 잘 맞아떨어지는 드믄 경우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박범신은 투견 출간 당시 “김숨은 현대사회의 병리학적 야만성에 의해 오늘도 죽임을 당하고 있는 식물성의 비명을 명징하고도 예민한 문체로 드러낸다”고 추천사를 적은 바 있다. 그는 “김숨의 작품을 두고는 칭찬할 말이 매우 많아 거듭 추천해도 아깝지 않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투견』(문학동네, 2005)은 그의 첫 번째 창작집이다. 인간의 야수성을 뛰어나게 묘파한 표제작 ‘투견’을 비롯해 7년여에 걸쳐 발표한 10편의 소설이 실려 있는 이 창작집은, 한국문학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는 새로운 작가군의 작품들 속에서 단연코 돋보인다.

한마디로 그의 소설들은 ‘칼’이고 ‘풀’이다. ‘칼’과 ‘풀’은 벌써 30여 년 전부터 상처받기 쉬운 나의 자의식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해온 말인데, 김숨의 ‘투견’을 읽을 때, 나는 단층이 심한 이 두 개의 이미지가 내 작품들에서보다 그의 작품 속에서 더 강렬하고 더 미학적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의 소설을 읽으며 다치지 않을 수 있는 길을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야수적인 폭력성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그의 ‘칼’은 너무 예리해서 읽을 때 때로 숨이 멈춰지고, 너무 미학적이어서 때로 큰 창자 작은창자 안벽을 면도날이 긁고 가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우리가 세계 자본주의 안락과 효율에 기대 살지만, 기실 그것이 얼마나 야만적인 폭력을 교묘하게 포장하고 있는지 그는 예민하게 수신하고 가차없이 포착해낸다. 그의 ‘칼질’이 한없이 여리고 맑은 식물성의 ‘풀’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가령 ‘투견’에서, 초복을 앞두고 매일 여러 마리의 개들이 도살되는 장면에 이르러, ‘목이 졸리고 온몸이 까맣게 그슬린 채, 개들이 싸지른 오줌과 낭자하게 흘린 피’ 옆에 ‘흐드러지게’ 피는 감꽃과 뚝뚝 떨어져 깨지고 마는 ‘붉은 홍시’를 배치한 장면을 보라. 그의 ‘칼’과 ‘풀’이 문명비판을 넘어서 심층에 담긴 인간 본질을 뛰어난 미학적 수준으로 견인해 올리는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최근에 책을 낸 장편 『철』(문학과지성사)도 그렇다. 그는 2000년대 한국문학의 트렌드와 일정하게 거리를 두면서도, 1990년대 한국문학이 작품 안에서 유기했던 본원적인 문제들을 소설이 결국 예술이라는 것을 최종적으로 상기시키는 단단하고 끔찍하게 아름다운 그릇 안에 담아내고 있다. 나는 앞으로도 김숨의 새 소설을 누구보다 먼저 읽는 첫 번째 독자가 되고 싶다.


◆박범신=1946년 충남 논산 출생. 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여름의 잔해’가 당선돼 등단했다. 93년 한 일간지에 소설을 연재하던 중 절필을 선언하고 96년 중반까지 칩거하다 ‘문학동네’에 중편 ‘흰 소가 끄는 수레’를 발표하며 다시 글쓰기를 시작했다. 장편 『토끼와 잠수함』『죽음보다 깊은 잠』『불의 나라』『물의 나라』『침묵의 집』 등. 문단작가 최초로 인터넷 연재소설 『촐라체』 를 발표했다. 대한민국문학상·김동리문학상·만해문학상·한무숙문학상 등을 받았다. 현재 명지대 문예창작과 교수, 서울문화재단 이사장.

◆『투견』(문학동네, 2005)=젊은 여성 작가군에서 발군인 소설가 김숨(35)의 소설집. 개를 잡아 보신탕집에 납품하는 아버지가 잔혹하게 도살하는 장면을 볼 때마다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나’의 시선으로 참혹한 풍경을 그려낸 ‘투견’을 비롯해 모두 10편의 단편이 담겼다. 잔혹하고 그로테스크한 세계에서 미학을 끄집어내는 작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