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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착같은 흔적' 하나 더 남기고 떠난 장영희

구름뜰 2009. 5. 11. 21:52

유작이 된 수필집 『살아온 기적 … 』

 
 “이 세상에서 나는 그다지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은 평균적인 삶을 살았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그다지 길지도 짧지도 않은 평균 수명은 채우고 가리라. 종족 보존의 의무도 못 지켜 닮은 꼴 자식 하나도 남겨두지 못했는데, 악착같이 장영희의 흔적을 더 남기고 가리라….” (‘희망을 너무 크게 말했나’ 중에서)

9일 타계한 장영희 서강대 교수는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것처럼 평균 수명은 다 채우지 못했다. 대신 ‘악착같은’ 자신의 흔적을 오롯이 남기고 떠났다. 12일 출간 예정인 수필집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샘터)이 유작이 됐다. 고인은 3월 30일 출판사에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포함한 원고를 넘기고, 입원 중에 마지막 교정지를 받아 4월 30일 검토를 마친 원고를 출판사에 보냈다. 그러나 책 인쇄가 끝난 8일에는 이미 의식을 잃은 그는 제본돼 나온 책을 펼쳐보지 못했다.

장 교수가 2000년 이후 월간 ‘샘터’에 연재한 글을 모은 이 책에는 생애 마지막 9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아홉해 동안 그는 보통 사람이 한 번도 감당하기 어려운 암 판정을 세 번이나 받았다. 그런데도 2000년 출간된 수필집 『내 생애 단 한번』에서 보여준 따뜻한 감성과 여유로운 재치는 전혀 빛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평범한 일상을 경이롭게 바라보는 시선엔 그 특유의 솔직함이 애틋하게 묻어나 있다.

“나는 참 많이 바깥 세상이 그리웠다. 창밖으로 보이는 파란 하늘 아래 드넓은 공간, 그 속을 마음대로 걸을 수 있는 무한한 자유가 그리웠고, 무엇보다 아침에 일어나 밥 먹고 늦어서 허둥대며 학교가서 가르치는, 그 김빠진 일상이 미치도록 그리웠다(…) 그리고 그 모든 일상을, 그렇게 아름다운 일을, 그렇게 소중한 일을 마치 아무일도 아니라는 듯 태연히 행하고 있는 바깥 세상 사람들이 끝없이 질투나고 부러웠다.”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중에서)

책 제목을 짓는데 유난히 집착이 강했던 고인은 이 책이 “기적의 책이 되었으면 한다”며 책 제목에 삶에 대한 희망과 강한 의지를 담았다. “생각해보니 나는 지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기적을 원한다(…)삶의 기적을 나누고 싶다.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기적이고 나는 지금 내 생활에서 그것이 진정 기적이라는 것을 잘 안다.” (‘프롤로그’ 중에서)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바깥 세상으로 다시 나가리라. 그리고 저 치열하고 아름다운 일상으로 다시 돌아가리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이 책은 그가 그토록 함께 하고 싶었던 사람들에게 소박한 흔적을 덤으로 남기고 눈을 감았다.

“내가 죽고 난 후 장영희가 지상에 왔다 간 흔적은 별로 없을 것이다. 어차피 지구상의 65억 인구 중에 내가 태어났다 가는 것은 아주 보잘 것 없는 작은 덤일 뿐이다. 그러나 이왕 덤인 김에,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덤이 아니라, 없어도 좋으나 있으니 더 좋은 덤이 되고 싶다.”(‘내가 살아보니까’ 중에서)

이은주 기자  중앙일보 5월11일자
 
소아마비와 암 이겨내고 기적을 살다 간 '소녀'

소녀’. 그를 만나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렇게 말한다. 그처럼 맑은 감성을 지닌 어른을 본 적이 없다는 설명을 덧붙인다. 그 소녀는 장영희(사진) 서강대 교수다. 우리 시대 대표 수필가이기도 하다. 9일 암 투병 끝에 57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샘터사, 2009)
갓난아기 때 소아마비를 앓았다. 후유증으로 항상 목발에 의지한다. 사회는 그를 ‘1급 장애인’으로 분류한다.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그가 세상을 저주했을 것이라면 오산이다. 오히려 ‘정상인’과는 다른 체험을 유머와 위트로 승화, 문학적 재능으로 버무렸다. 수필과 신문 칼럼으로 사람들에게 희망을 줬다. 2001년 유방암에 걸려 수술을 받고 완치됐지만 2004년 다시 척추암 선고를 받고 활동을 중단했다. 그러나 이듬해 봄 다시 강단에 복귀했다. 그의 삶은 살아온 기적이었고, 사람들에게는 살아갈 기적이었다.

#『내 생애 단 한번』(샘터사, 2000)
“무미건조하고 습관화된 삶보다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처럼 열심히 해야 제 맛”이라는 게 그의 인생관이다. 삶이라는 책에서 한 페이지만 찢어낼 수 없다. “우리들 각자가 저자인 삶의 책에는 절망과 좌절, 고뇌로 가득 찬 페이지가 있지만 분명히 기쁨과 행복, 그리고 가슴 설레는 꿈이 담긴 페이지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글에는 교도소에 있는 재소자나 병원에 있는 환자들이 더 뜨거운 반응을 보낸다.

#『문학의 숲을 거닐다』(샘터사, 2005)
그는 영문과 교수다. 아버지(고 장왕록 서울대 명예교수)의 뒤를 이었다. 1975년 서강대 영문과를 졸업한 뒤 85년 뉴욕주립대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생각하는 갈대』『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스칼렛』등을 번역했다. 중ㆍ고교 영어 교과서를 집필하기도 했으며 한국번역문학상과 올해의 문장상 등을 수상했다.

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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