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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김기택 시집 [껌]

구름뜰 2009. 5. 19. 10:45

그에게 들키다, 내 안의 감추고 싶은 기억

 
 시를 읽을 때, 나는 순수한 독자로 돌아간다. 좋아하는 시를 발견하면 마음껏 경탄하고 질투하며, 또 마음껏 경외한다. 그것은 미처 시인이 되지 못한 세상 모든 독자의 특권일 것이다. “너무나도 낯선 낯익음”으로 나를 사로잡는 시들이 있다. 마치 어느 날, 가로등 불빛 아래서 ‘딱’ 마주친 익숙하고도 낯선 이웃 남자의 얼굴처럼 말이다. 김기택 선생의 시들은 내게 언제나 그랬다. 시인의 첫 시집인 『태아의 잠』에서부터 가장 최근에 펴낸 시집 『껌』에 실린 시들까지.

나는 『껌』을 지하철 안에서 읽었다. 그리고 사무실 책상 위에서도 몰래몰래 읽었다. 늦은 밤 주황빛 스탠드불빛 아래서도 읽고, 티브이를 보면서도 읽고, 라면을 먹으면서도 읽고, “가부좌를 튼” 좌변기 위에서도 읽었다. “온몸을 두려움으로 만들어 짖는” 개를 쓰다듬으면서도 읽었다. 마치 껌을 씹듯, 오로지 껌 씹기에만 몰두하듯, 시집을 펼쳐 시어 하나하나를, 집요하게 따라 읽었다. 어쩌면 나는 무의식중에, 질겨질 대로 질겨진 껌을 씹듯 어금니를 끄으윽 끄으윽 갈아댔는지도 모르겠다. 그러고도 좀처럼 시집을 덮을 수가 없어 칠일 동안을 내 가방에 넣고 다니며 틈나는 대로 펼쳐 읽었다.

충북 옥천군 장계관광지에 조성된 시비공원 ‘시문학 아트로드’가 16일 문을 열었다. 관람객들이 제17회 정지용 문학상 수상작 유자효 시인의 ‘세한도’ 시비를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그 언젠가 내가 씹다 뱉어버린 껌은 놀랍게도 시인의 시집 『껌』 한 귀퉁이에 달라붙어 있었다.

“아무리 짓이기고 짓이겨도/다 짓이겨지지 않고/조금도 찢어지거나 부서지지도 않은 껌./(…)/이빨들이 잊고 있던 먼 살육의 기억을 깨워/그 피와 살과 비린내와 함께 놀던 껌./지구의 일생 동안 이빨에 각인된 살의와 적의를/제 한몸에 고스란히 받고 있던 껌./ 마음껏 뭉개고 갈고 짓누르다/이빨이 먼저 지쳐/마지못해 놓아준 껌.”(‘껌’ 부분)

그렇게 시인은 “누군가 씹다 버린 껌”을 줍듯, 세상에 버려진 상처와 비명을 주워 한 편의 시로 빚어낸다. 시인의 시들은 결코 가르치려 하지 않지만, 시인의 시를 읽고 나면 뭔가를 들키고, 적발당하고, 적발의 과정을 통해 크게 깨달은 기분이 든다. 기실 내 일상에는 적발당해도 싼, 허술하고 폭력적이며 악다구니에 가까운 ‘대상’들이 무수히 잠복해 있다. 다만 내가 그것들을 망각하거나 슬그머니 감추어두고 지낼 뿐.

시인의 묵묵하고 예리한 응시가 이루어낸 적발이,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바짝 긴장시킨다.

◆김숨=소설가. 1974년 울산 출생. 1997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느림에 대하여’가, 98년 ‘문학동네신인상’에 ‘중세의 시간’이 각각 당선돼 문단에 나왔다. 소설집 『투견』 『침대』, 장편소설 『백치들』 『철』이 있다.

◆『껌』=미당문학상·김수영문학상 등을 수상한 김기택(52)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네 번째 시집 『소』(2005)를 출간한 뒤 직장을 버리고 전업시인의 길로 들어선 뒤 쓴 작품을 묶었다. “지구의 일생 동안 이빨에 각인된 살의와 적의”를 파헤친 시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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