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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껌』을 지하철 안에서 읽었다. 그리고 사무실 책상 위에서도 몰래몰래 읽었다. 늦은 밤 주황빛 스탠드불빛 아래서도 읽고, 티브이를 보면서도 읽고, 라면을 먹으면서도 읽고, “가부좌를 튼” 좌변기 위에서도 읽었다. “온몸을 두려움으로 만들어 짖는” 개를 쓰다듬으면서도 읽었다. 마치 껌을 씹듯, 오로지 껌 씹기에만 몰두하듯, 시집을 펼쳐 시어 하나하나를, 집요하게 따라 읽었다. 어쩌면 나는 무의식중에, 질겨질 대로 질겨진 껌을 씹듯 어금니를 끄으윽 끄으윽 갈아댔는지도 모르겠다. 그러고도 좀처럼 시집을 덮을 수가 없어 칠일 동안을 내 가방에 넣고 다니며 틈나는 대로 펼쳐 읽었다.
충북 옥천군 장계관광지에 조성된 시비공원 ‘시문학 아트로드’가 16일 문을 열었다. 관람객들이 제17회 정지용 문학상 수상작 유자효 시인의 ‘세한도’ 시비를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아무리 짓이기고 짓이겨도/다 짓이겨지지 않고/조금도 찢어지거나 부서지지도 않은 껌./(…)/이빨들이 잊고 있던 먼 살육의 기억을 깨워/그 피와 살과 비린내와 함께 놀던 껌./지구의 일생 동안 이빨에 각인된 살의와 적의를/제 한몸에 고스란히 받고 있던 껌./ 마음껏 뭉개고 갈고 짓누르다/이빨이 먼저 지쳐/마지못해 놓아준 껌.”(‘껌’ 부분)
그렇게 시인은 “누군가 씹다 버린 껌”을 줍듯, 세상에 버려진 상처와 비명을 주워 한 편의 시로 빚어낸다. 시인의 시들은 결코 가르치려 하지 않지만, 시인의 시를 읽고 나면 뭔가를 들키고, 적발당하고, 적발의 과정을 통해 크게 깨달은 기분이 든다. 기실 내 일상에는 적발당해도 싼, 허술하고 폭력적이며 악다구니에 가까운 ‘대상’들이 무수히 잠복해 있다. 다만 내가 그것들을 망각하거나 슬그머니 감추어두고 지낼 뿐.
시인의 묵묵하고 예리한 응시가 이루어낸 적발이,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바짝 긴장시킨다.
◆김숨=소설가. 1974년 울산 출생. 1997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느림에 대하여’가, 98년 ‘문학동네신인상’에 ‘중세의 시간’이 각각 당선돼 문단에 나왔다. 소설집 『투견』 『침대』, 장편소설 『백치들』 『철』이 있다.
◆『껌』=미당문학상·김수영문학상 등을 수상한 김기택(52)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네 번째 시집 『소』(2005)를 출간한 뒤 직장을 버리고 전업시인의 길로 들어선 뒤 쓴 작품을 묶었다. “지구의 일생 동안 이빨에 각인된 살의와 적의”를 파헤친 시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