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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어 해 전 남의 선반에서 빌려온 계간지를 펼쳐두고 소설 한 문단을 음독하다가 깜짝 놀라 첫 문장부터 다시 읽은 적이 있었다. 전성태 소설가의 ‘존재의 숲’이었다. 그 때는 이미 소설가의 두 번째 작품집이 묶여 나온 뒤였으니 늦어도 많이 늦게 소설가의 소설을 접한 셈이었다. 여름비를 맞은 듯했다.
전성태 소설가의 『국경을 넘는 일』을 235페이지까지 음독했다. 문장도 이야기도 차졌다. 공들여 읽을 수밖에 없었다. 때론 해학으로 때론 비감 어린 서사로 펼쳐내는 여덟 가지 이야기가 수사 몇 마디 없이 단정하게 사람을 향하고 있었다. 좀처럼 웃을 일 없는 소녀에게 꽃비, 비꽃을 보여주려고 막대질을 한 대가로 실명에 이를 뻔한 상처를 입은 소년이나 밤새 기둥을 하얗게 밀어내며 조각을 새긴 소년은 아무래도 소설가라서, 책날개로 돌아가 소설가의 얼굴을 보게 만들었다. 단편 ‘존재의 숲’ 이후로는 캄캄한 삶을 밟는 발의 마음가짐에 대해서 생각했고 ‘한국의 그림’에선 감탄하며 웃다가 찡했다. 단편 ‘연이 생각’에서 루마니아 민중의 참혹한 생활을 목도하곤 “우리 루마니아”라 표현한 연이의 엽서엔 내가 함께 참담했다. “삶이나 사람을 좀처럼 맞보거나 내려다보지 못한다”는 소설가의 고백엔 멋대로 품은 신뢰에 보답을 받은 듯했다.
그리고 이를테면 이런 대목에 나는 집착하고 마는 것이다.
“왜 사람들이 태극기를 짓밟고 있습니까.”
“(…) 밟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은 그냥 춤을 추는 거지요.”
“왜 춤을 출까요?”
“봄이잖아요.”
연심(戀心)을 한쪽 내놓으라는 원고 청탁에 문득 마음이 좋지 않았던 것은 멋진 말에 능하지 못한 내가 이 곡진한 책에 덧붙일 오해가 두려웠기 때문이고, 좋은 것을 혼자서 간직하고 싶다는 사나운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독자의 처지에서 나는 그가 귀하다. 며칠 전 서점을 방문했다가 소설가의 새로 출간된 책을 발견했다. 오매, 하고 가방에 챙겨서 책상 위 선반에 옮겨두었다. 책상이 문득 든든하고 선득하다. 아껴 읽겠다.
◆『국경을 넘는 일』(창비, 2005)=전성태(40) 작가의 두번째 소설집. ‘존재의 숲’ ‘퇴역 레슬러’ ‘한국의 그림’ ‘소를 줍다’ ‘연이 생각’ ‘국경을 넘는 일’ 등 단편 8편이 묶였다.
◆황정은(사진)=1976년생. 200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소설로 등단했다.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소설’ ‘올해의 문제 소설’에 선정되고 이효석문학상·한국일보문학상 후보에 오르는 등 주목받는 신예. 소설집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