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돼지
내 유년의 고향집에는 꽃이 없었다. 장독대 옆 맨드라미 꽃잎으로 화전을 만들어주던 큰엄마는 내게 꽃처럼 예뻐 보였고, 조붓한 담장 밑에라도 채송화나 봉숭아가 몇 포기라도 있는 집은 향기로워보였다. 우리 집에 꽃이 없는 것은 엄마가 꽃을 좋아하지 않아서 그런 줄 알았다.
'그 돼지'는 작아서 팔기도 뭐한 것을 외할머니께서 주신 거였다. 외삼촌과 둘만 살던 외가에 사고가 났고, 아버지가 내 일처럼 달려가 처리를 해준 답례였다. 그 돼지를 처음 본 것은 보자기에 싸여서 얼굴만 내민 채 외삼촌 손에 들려져 우리 집 마당으로 들어설 때였다 아버지는 옮겨심기엔 큰 대추나무를 그대로 두고 울타리를 만들어 아기돼지 집을 지었다. 사료는 고구마와 감자를 푹 삶아서 등겨와 섞어 유동식으로 주기도 하고, 보리와 콩 등을 가마솥에 볶아 만든 미숫가루와 섞여 먹이기도 했다.
덩치는 작아도 교배시키면 수태가 잘 됐고 새끼치기도 잘 되었다. 매번 12마리 이상을 낳았다. 처음 문 젖꼭지를 자기 것으로 알아서 발육이 더딘 녀석을 잘 나오는 젖에다 물리면 슬금슬금 제 젖꼭지를 찾아간단다. 1년에 두 번 새끼를 낳았고, 새끼는 두 달을 키우면 팔았다. 팔 때마다 우리 집에는 논이 한마지기씩 불어났다.
성장기 두 달 동안 마당은 아기 돼지들 차지였다. 돼지들이 마당으로 나오기 시작하면 녀석들의 외출을 막기 위해 대문에는 40센티 정도의 칸막이가 설치되었고, 우리들은 대문을 드나들면서도 담 넘듯이 해야 했다. 감나무 그늘에서 공기놀이 땅따먹기 하던 친구들은 칸막이가 있으면 그 마당이 돼지 차례라는 걸 알았고, 친구들과 놀던 그늘에선 아기돼지들만 늘어진 단잠을 즐겼다.
엄마는 먹이를 줄때 파블로프의 개 실험 종소리처럼 "똘똘똘똘"이라고 육성신호를 보냈다. 언젠가 장터에 돼지 팔러갔던 날, 새끼줄이 풀어져서 흩어지는 사태가 발생했고, 사람들의 걱정을 들었지만, 엄마는 가만들 있어보라 하고는 예의 그 "똘똘똘똘"을 외쳣고 모두들 모여들었다는 동화 같은 얘기도 있다.
돼지가 해산하는 밤, 돈사에선 길게 누운 ‘그 돼지’와 그 곁을 지키고 앉은 아버지의 크고 넓은 어깨가 희미하게 보였었다. 그런 밤엔 엄마도 우리를 조용히 다독이셨다. 우리는 마당에까지 내려서진 않았지만 몇 마리를 낳았는지 알 만큼 부모님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는 밤이었다. 돼지의 분만이 진행되는 그 밤이 진중하고도 경사스런 일이라는 걸 은연중 알고 있었다.
'그 돼지‘는 7년 넘게 살았고, 새끼는 15번 낳았다. 부모님이 대처로 이사 나갈 용기를 낼 만큼 살림을 일궈준 살림밑천이었다. 인근 면까지 소문이 나서 타동네 사람이 계약금을 주고 갔지만, 가까이 살던 먼 친척이 욕심을 냈고, 자기가 알아서 하겠노라고 하고선 안사람에게 구두약속 한 것을 바깥양반이 몰라서 받은 것이라며 계약을 파기했다고 한다.
그 집으로 가서 이듬해 새끼 3마리를 낳고 그 돼지는 하늘로 갔다. 아기돼지들도 함께. ‘그 돼지’가 떠난 지 30년도 넘었지만 ‘선의지로 하는 일은 좋다’는 아버지의 지론까지 더해 우리가족에겐 흥부의 제비처럼 잊을 수 없는 이야기다.
마당에 꽃은커녕 잡초 한포기도 없었던 것은 수시로 풀어놓아야 했던 아기돼지 때문이란 걸, 부모님 삶 자체가 꽃 피우는 일이었다는 걸, 나는 어른이 되고도 한참 후에나 알았다. 감나무 한 그루와 돼지우리 속에 몸통을 두게 된 대추나무가 전부였던 집, 내 유년의 마당에 꽃은 없었지만, 부모님 살아온 세월이 언제부터인지 내가 살아가는 날들 속에서 꽃으로 피어나고 향기가 되고 있음을 나는 느낀다.
보기만 해도 장난기가 스멀스멀 발동할 것 같은 강아지 풀!
먹빛으로 담아낸 강아지 풀, 이 계절엔 처연한 정겨움이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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