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에서 산 쪽으로 맨 끄트머리 집 나이 육십 돼 과부장가 든 김효만씨, 묵은 아궁이에 군불 지피느라 진땀깨나 뺍니다.
며칠 전 새 마누라 자리가 넌저시 안채보다는 사랑채가 거허기 좋겄다고 들녘도 훤히 뵈고 드나들기도 편허겄다고 했던 말 따라 이튿날로 팔 년 동안이나 안 때던 부엌에 무쇠솥 다시 걸고 뒷산 올라 어영차 나무까지 해왔는데
무슨 일인지 김효만씨 궁시렁대는 소리 사립문 밖까지 나옵니다 어라 이노무 장작이 왜 이런댜 붙으란 불은 안 붙구 연기만 홀홀 지리고 자빠졌네 아궁이도 그려 아무리 새로 손봤다 혀도 쓰던 아궁인디 어째서 헛심만 빼내고 그러능겨 그바람에 도토리 훔치러 왔던 청설모만 화들짝 도망칩니다
군고구마에 목 빼던 마누라 자리가 그 새를 못 참고 한마디 던집니다 쑤석거리기만 헌다고 불이 붙겄슈 갈잎 쏘시개 먼저 타게 허고나서 장작을 들이밀던지 고구마를 넣던지 허야지 팔 년 묵은 아궁이가 어디 기다렸다는 듯 불을 들이겄남유
김효만씨 이래저래 혼자 생각해도 민망합니다 육십 나이에 부엌 들어가 아궁이에 사정사정 군불 한 번 지펴보자는 요량이 밤 깊을수록 남 우습습니다.
- 이진수 -내일을 여는 작가 2004년 겨울호
'동네에서 산 쪽으로 맨 끄트머리 집'이니까 그 집 살림 형편 보나마나 뻔하다.
게다가 나이조차 육십이라니 이런 헌 신랑에게 누가 시집을 오겠는가.
운 좋게 새 마누라 자리 얻어 걸린 김효만씨
혹시라도 마음 바뀔까봐 전전긍긍하는 모습 안쓰럽다.
안쓰러운 일 중 가장 안쓰러운 일이 제 몸을 제 마음대로 할 수 없을 경우.
허나 아무리 맘이 급해도 팔 년 묵은 아궁이에 쉽사리 '장작'들이밀 수 없는 노릇
그런데 김효만씨 사정사정 아궁이에 군불 한 번 지펴보려는 진짜 속셈은 어디에 있나.
'들녘 훤히 뵈는'곳에서 활활 불을 지펴야 올해 들녘에 풍년이 든다고 믿기 때문 아닐까.
-장옥관 시인
김효만씨 무릎까지 까진! 안쓰러운 사연을 어휘에서 묘사까지
한 폭 풍경처럼 재밌게 그려 내셨습니다.
에고 이 안쓰러운 풍경을 도와줄 수도 없고,ㅋㅋ 어쩌면 좋을까요.
쓰던 아궁이도 아니고 팔년 동안이나 쓰질 않았으니..
아궁이 군불 지피느라 진땀빼고도 남겠지요.
"사랑채가 거허기 좋겠다"는 새 마누라 말에
뒷산 올라가 나무까지 해 오는 모습 이쁩니다. 귀엽습니다.
그랬건만 나무까지 해 왔건만, 헛심만 빼는 '장작'도 고약하고 '
'아궁이'도 고약해서 궁시렁대는 소리 사립문 밖까지 나가고 놀란 청솔모 화들짝 달아납니다.
"쑤석 거리기만 한다고 불이 붙겄슈" 새마누라 강한 충고에 ㅋㅋ
이래저래 민망합니다. 아궁이를 붙들고 사정사정!! 하고싶은데..
육십 나이에 아궁이 붙들고 사정사정!!하는 김효만씨
애꿎은 아궁이 탓만하니.. 원..
비가 올 듯 꾸물꾸물한 아침입니다..
집에 국화분 3개가 있는데
백만송이 국화!!쯤 될 것 같은 봉오리가 함참 꿈틀대고 있습니다..
며칠이 되었는데 이렇게 뜸만 들이고 있습니다, ㅋㅋ
꽃봉오리 시절이 더 아름답기도 하지요.
창밖 자연물은 갈수록 고와지고, 늘 그자리에 있는 것들인데.
도드라지는 색으로 생경스러운 것들도 있습니다..
붉게 물든 것, 노랗고, 누런 황급빛까지 그 아래 낙엽까지
눈길가는 곳마다 이쁜 모습들입니다. 이 가을도 금방이겠지요.
자연은 어김없는 질서로 언제나 의연합니다.
우리 삶은 자연물 반만 닮아도 좀 의연해 질 것 같은데
늘상 무언가를 갈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했지요.
사랑(eros)은 뭔가 부족한 것을 깨닫고 그것을 원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 원하는 대상중에 소크라테스가 가장 중요하게 꼽은 것은 '지혜'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 말, "지혜(sophia)"와 "사랑하다(philos)"를 더하면 철학이 된다고 하더군요.
소크라테스에게 진정한 사랑은 지혜에 대한 사랑( 즉 지혜를 가지고자 갈구하는 것)이었지요.
' 플라토닉 러브'란 동성애건 이성애건 서로 마음을 교류하며 지혜를 추구하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에로스는 내게 없는 것, 곧 아름다움(진, 선, 미)을 가지고 싶어하는 욕망이고
그것이 곧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에로스)을 할 수 있는 존재는 신도 동물도 아닌 인간뿐이라고 합니다.
뭔가 지금보다 나은것을 욕구하는 것, 곧 사랑(진선미에 대한 갈망)인 셈이지요.
그것이 본능이고 그 갈망은 내게 잠재된 가능성이기도 합니다.
그 가능성을 토대로 노력하는 것, 그 향상감을 맛 볼때 인간은 행복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 본능 때문에 사랑을 갈구하며 사는 것이라 합니다.
김효만씨가 육십이든 칠십이든 무릎이 까지도록 열심히 장작불을 지피려 애쓰는 것도,
부족한 것을 채우고자 하는 욕구겠지요. ㅎㅎㅎ
사람 참 아름답지 않나요. 불완전해서..
수시로 아프고 넘어지고, 자빠지고 엎어지지 말아야 할곳에서
털석 엎어지기도 하고,, 그런 모습 말입니다.
누군들 삶에 대한 숱한 욕망 없을라구요.
그러나 절제하며 사회 정의에 일조하며 살아가는 오늘의 수많은 우리들
깨지고 넘어지는 속에서 그래도 잘 살아가는 모습, 아름다운 것입니다.
설령 아무리 봐도 아픔이나 상처뿐이더라도
그것도 끌어안고 살아간다면 가치 있는 삶인 것입니다.
행복은 사건(내게서 일어난 일 들, 예기치 않게 닥친일)에서 오는게 아니라
사건에 대한 '생각'에서 온다는 놀라운 격언이 있더군요
애쓰는 삶, 향상되고저 노력하는 삶,
끌어안고 살아가고 있다면 시리도록 아름다운 것입니다.
김효만씨 처럼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