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에 와서 다 죽었다 / 유홍준
벤자민과 소철과 관음죽
송사리와 금붕어와 올챙이와 개미와 방아깨비와 잠자리
장미와 안개꽃과 튤립과 국화
우리 집에 와서 다 죽었다
죽음에 대한 관찰일기를 쓰며
죽음을 신기해 하는 아이는 꼬박꼬박 키가 자랐고
죽음의 처참함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듣는 아내는 화장술이 늘어가는 삼십대가 되었다
바람도 태양도 푸른 박테리아도
희망도 절망도 욕망도 끈질긴 유혹도
우리 집에 와서 다 죽었다
어머니한테서 전화가 왔다
별일 없냐
별일 없어요
행복이란 이런 것
죽음 곁에서
능청스러운 것
죽음을 집 안으로 가득 끌어들이는 것
어머니도 예수님도
귀머거리도 시인도
우리집에 와서 다 죽었다
아교/유홍준
내 아버지의 종교는 아교,
하루도 아니고
연사흘 궂은비가 내리면
아버지는 선반 위의 아교를 내리고
불 피워 그것을 녹이셨네 세심하게
꼼꼼하게 느리게 낡은 런닝구 입고 마루 끝에 앉아
개다리소반 다리를 붙이셨다네
술 취해 돌아와 어머니랑 싸우다가
집어던진 개다리소반……살점 떨어져나간 무릎이며 복사뼈며
어깻죽지를 감쪽같이 붙이시던 아버지, 감쪽같이
자신의 과오를 수습하던 아버지의 심정은 어땠을까
아, 아버지의 종교는 아교!
세심하게 꼼꼼하게 개다리소반을 수리하시던
아교의 교주 아버지 보고 싶네
내 뿔테안경 내 플라스틱 명찰 붙여주시던
아버지 만나 나도 이제 개종을 하고 싶다 말하고 싶네
아버지의 아교도가 되어
추적추적 비가 오는 아교도의 주일날
정확히 무언지도 모를 나의 무언가를 감쪽같이 붙이고 싶네.
'정확히 무언지도 모를 나의 무언가' '감쪽같이 붙이고 싶'은 마음,
아버지의 아교도가 되고 싶은 심정이 된'
그때 아버지 상황이 된 아들이 보인다.
무언지도 모르는 나를 무언가 감쪽같이 붙이고 싶은..
풍경으로만 남은 사람, 그때 그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세월 지나서 내가 그상황이 되었을 때에야 알게 되는
그때 몰라서 미안하고 안타까운 것들 얼마나 많을까.
** 며칠 전 " 내가 크게 웃는 것도 누군가에게 미안한 일 일 수 있다"고
어느 시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는 그 순간 그 말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행복과 불행이 한 모습이라는 것,
행복만
불행만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 얼마나 다행인가.내게 아픔만 있었다면 그 아픔을 제대로 알 수 있었을까.
대체로 상황은 그에서 벗어나고서야 더 제대로 볼 수 있으니.
그 속에 있을 때는 본질을 잘 모르지 않을까.
안에 있든 밖에 있든
내가 행복하지만은 않다는 것,
내가 힘들지만은 않다는 것
내가 아프지만은 않다는 것
그것을 아는 것이 참으로 행복한 일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