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수필

포도나무 아버지

구름뜰 2012. 7. 23. 09:05

 

 

 

  얘야 올해는 가뭄 때문에 포도넝쿨이 엉망이구나 아버지 핏줄 한 가닥을 뽑아 나에게 내미신다 자아 받아라 어서, 이제는 이 포도넝쿨을 너에게 넘겨주어야 할 때가 온 것 같구나 아버지 굵은 당신의 팔뚝에서 핏줄 한 가닥을 뽑아 나에게 내미신다 한사코 내밀고 계신다 두 손을 내 밀어 나는 아버지의 핏줄을 받는다 우리 집 포도밭 깊숙이 구덩이를 파고 아버지의 핏줄을 옮겨 심는다 넝쿨마다 아버지의 심장이 달리는 포도나무 마디마다 아버지의 눈동자가 주렁주렁 달리는 포도나무 가지마다 넓적한 아버지의손바닥 이파리가 돋아나는 포도나무를 옮겨 심는 다 드디어 나는, 아버지의 포도를 딴다 상자마다 크고 검붉은 아버지의 포도를 따서 담는다 한 상자 또 한 상자 아버지의 벌렁거리는 심장을 담아 싣고 시장으로 내달려 간다 얘야 내 포도를 네가 먹으니 즐겁구나 얘야 내 포도를 네가 팔아 새 옷을 사 입으니 보기 좋구나 아버지 껍질눈이 웃으신다  알맹이 발라먹고 뱉은 아버지 껍질눈이 새 옷 사 입은 나를 바라보며 웃고 계신다 행복하다 생전의 할아버지 깊디깊은 눈 속 한번도 들여다본 적이 없는 어린것들이 달라붙어 포도를 먹는다 한 송이 또 한 송이 할아버지 포도를 먹어치운다 알맹이만 발라먹고 뱉어버린 아버지, 껍질눈이 웃으신다 어린것들 바라보며 웃고 계신다.

-유홍준

 

시험준비한다고 1년 남짓한 시간을 면벽수행하듯 지낸 큰애가 독방을 면하게 되었다.

 

" 할아버지 할머니. 첫 월급타면 선물 해 드릴게요"

저녁먹는 자리에서 외손자가 한 말, 

회덮밥에 붉은 초고추장 더해

붉게 붉게 비벼진다. 

 

저녁 먹고 돌아오는 길,

할아버지 저만치 앞서 가시고,

그 뒤를 할머니 따라가시고 

뜨듯해진 오감 음미 하느라,

속을 꽉 채운 회덮밥 되새김 하느라

말이 없다.

 

말을 잃는 가족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할아버지 뒤를 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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