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종 시인이 ‘방문객’이란 시에서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라고 쓴 게 기억이 납니다. JTBC 뉴스 앵커인 저는 지난 금요일, 마이크를 들고 삼청동 인수위 해단식에 나갔다가 어마어마한 일생들이 걸어오는 것을 봤습니다. 당선인 신분이었던 박근혜 대통령이 벤츠를 타고 행사장을 빠져나가자 박근혜의 사람들이 줄줄이 사무실에서 나오더군요.
바람 찬 인수위 앞마당에서 박근혜의 사람들을 50분간 인터뷰하면서 제 마음속엔 앞으로 펼쳐질 박근혜 시대 5년의 기쁨과 걱정이 영상처럼 떠올랐답니다.
기쁨은 무엇인가.
국방장관 출신인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의 눈빛을 본 것이었습니다. 김 실장은 김정은의 핵 협박에 대해 묻자 “핵 10개보다 무서운 게 사람의 눈빛이다. 이 말을 김정은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김정은에게 전해 달라고 했지만 우리 국민을 향한 호소였습니다.
-그들이 우리한테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협박했는데 오히려 김정은이 하룻강아지 아닌가.
“그 말이 맞다. 딱 맞아요.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가 있다면 그걸 지키겠다는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 조직이든 사람이든 국가든 결국 생존과 번영 의지다.”
김정은이 핵으로 쏘고자 하는 것은 한국 국민의 생존과 번영 의지일 겁니다. 한국인의 눈빛을 공포와 두려움으로 채워서 덮어놓고 양보하라는 여론을 만들어내는 것, 이게 김정은이 바라는 것이죠. 김장수 안보실장의 눈빛은 핵 정국의 본질을 꿰뚫은 것이어서 마음 든든했습니다.
링컨처럼 생긴 유민봉 국정기획수석의 턱수염을 본 것도 기쁨이었습니다. 남의 턱수염을 본 게 왜 기쁨이냐고요? 턱수염은 근엄하고 의전적인 권력 문화와 색깔이 다르기 때문이죠. 길거리에서 턱수염은 하나의 취향이지만 청와대에서 턱수염은 주변의 무거운 공기를 벗어나는 일말의 자유의 바람이죠.
-청와대에 가서도 계속 턱수염을 기를 건가.
“(다른 곳을 쳐다보다 다소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길러야죠.”
-인수위가 조용하긴 했는데 감동은 없었다.
“(잠시 생각하더니) 조용한 감동이 필요하겠죠.”
유 수석은 ‘조용한 감동’이란 표현을 썼습니다. 조용하고 겸손한 건 박근혜 대통령이 주문하는 가치이고, 감동과 시원함은 국민이 요구하는 가치인데 둘을 섞었습니다. 그가 청와대의 무거운 공기를 헤치고 국민을 유쾌하게 하는, 감동을 아는 인물이길 바랍니다.
걱정은 무엇인가.
박 대통령의 사람들은 감동과 재미와 시원함이 적습니다. 좋은 정부는 좋은 정책으로만 되는 게 아닙니다. 좋은 설득이 있어야 합니다. 좋은 설득엔 감동과 재미가 필수적이죠. 박근혜의 사람들은 스스로 해방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국민에게 감동을 주고 국회를 설득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의 사람들은 대체로 ‘무언가에 지그시 눌려 있다’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해단식을 마치고 나오던 윤창중 인수위 대변인만 해도 그렇습니다. 마이크를 잡고 접근하던 저를 보더니 무엇에 놀란 듯이 등을 보이며 뛰더군요. 아직 자리가 주어지지 않아(윤 대변인은 엊그제 청와대 대변인 자리를 발령받았죠) 인터뷰가 부담스러웠겠다는 생각은 했습니다. 그렇다 해도 스스로 자유롭고 국민에게 속 시원한 쾌감을 선사하는 인물형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왜 뛰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일까? 이런 의문을 갖는 국민들에게 대변인이 무엇을 설득할 수 있을까요.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건 ‘무엇을 말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말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설득이론이 있습니다. 대통령의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설득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설득의 수단을 갖춰야 합니다. 설득은 말로만 하는 게 아닙니다. 설득은 전인격적으로, 표정으로, 움직임으로, 바람결로, 한 줄의 메시지로 하는 겁니다. 김장수 실장의 눈빛, 유민봉 수석의 턱수염이 주목받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쇠고기 통상외교나 대북정책에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국민 설득에 실패했을 뿐입니다. 촛불시위는 정책의 실패가 아니라 설득의 실패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박근혜의 사람들은 실세(實勢)를 용서 않는 대통령의 용인(用人)철학에 눌려 있습니다. 대통령의 뜻이 조용하고 겸손하라는 데 있지, 강박에 눌려 감동도, 재미도, 시원함도 표현하지 못하는 목석이 되라는 건 아닐 겁니다. 대통령의 사람들이 감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게 국민 설득력을 되찾는 출발이 될 것입니다. 대통령의 사람들, 자기를 해방하시길 바랍니다.
전 영 기 논설위원·JTBC 뉴스9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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