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마지막 날. 오늘을 겨울의 최종일로 선언한다. 내일은 3월의 첫날. 추워도 봄의 시작이다. 처음 만난 사이에 얘깃거리가 궁하다 보면 ‘어떤 계절을 가장 좋아하느냐’고 묻는 지경에 이른다. 4지선다형인데도 그때마다 답이 달랐다. 이젠 요령이 생겼고 준비한 답은 이렇다. “다음 계절이오.” 겨울에는 봄, 여름에는 가을. 그야말로 긍정, 낙관적인 대답이다. 가장 좋은 계절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간주하니 걸음조차 가벼워질 듯하다.
며칠 전 외동아들이 대학을 졸업했다. 어릴 적에 부모가 사다 준 『레 미제라블』을 읽고 난 후 표지에 적힌 빅토르 위고와 번역자 이름을 가리키며 누가 더 돈 많이 버느냐고 묻던 녀석이다. 책 많이 읽으면 저절로 돈 많이 벌게 된다는 대답을 듣고 자라선지 졸업 전에 로스쿨과 의학대학원을 동시에 합격하는 괴력을 발휘했다. 두 장의 합격증을 앞에 두고 고민(?)하는 걸 보며 가상의 책제목이 떠올랐다. ‘야심은 벌레도 책 읽게 한다.’
책 많이 읽었다고 뻐기는 건 밥 많이 먹었다고 자랑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나의 ‘궤변’은 앙상한 독서력을 가리려는 자기변명의 일환이다. 한때 입사지원자의 자기소개서에 ‘나를 키운 건 ○할이 ○○다’가 유행한 적이 있다. 서정주 시인의 ‘자화상’ 일부를 원용한 것인데 원문은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다. 이를 나에게 적용한다면 1할 정도는 신문지에 배당할 의향이 있다. (구식 라디오에서 이미자의 ‘동백아가씨’가 흘러나오던 시절로 잠시 돌아간다.)
신문이라 하지 않고 굳이 신문지라 한 점이 수상하지 않은가. 신문에 세상이 담겨 있다면 신문지엔 세월이 묻어 있다. 나는 시장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다. 여섯 살 때 생모를 여의고 고모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곳이 서울 돈암동시장이었다. 가게 이름은 북청상회. 물장수로 유명한 북청에서 월남한 고모는 젊어서 혼자 된 후 재가하지 않았다. 별명이 또순이였다. 문맹이었지만 기억력이 비상했고 친화력도 뛰어났다. 오라비의 막내아들인 조카를 사람 만들어보겠다고 무던히도 애쓴 분이다.
학교 근처에도 못 가보셨지만 교육관은 남달랐다. 요약하면 자율과 칭찬이었다. 가게에 단골손님이 오면 반드시 나를 소개했다. “참 잘생겼죠. 보통내기가 아니랍니다.” 난 대우받으며 자랐다. 가난했지만 위축되지 않은 건 순전히 고모의 과대평가 덕분이었다.
교육환경은 좋지 않았다. 집에 책이라곤 없었다. 하지만 폭풍우 속에서도 등대는 보인다. 신문을 구독할 리 없는데도 가게엔 신문지가 널려 있었다. 물건 팔 때 싸주는 봉투 대용이었다. 나의 독서거리는 바로 그 봉투가 되기 전의 신문, 아니 신문지였다. 심심했던 나는 어느 순간부터 그걸 읽기 시작했다. 읽어도 아주 꼼꼼히. 닥치는 대로 읽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사실은 그냥 읽고 마는 게 아니라 그 내용에 대해 무한상상을 했다는 것. 신문엔 성공한 사람도 나오고 실패한 얘기도 나온다. 실패로 잃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얻는 것도 있다. 바로 ‘실패의 경험’이라는 보석이다. 이런 깨달음이 어디서 나왔겠는가. 신문지였다.
소년은 치정사건의 개요도 읽고 시사만화도 보았을 게다. 당시엔 특히 영화광고가 많았다. ‘아낌없이 주련다’ ‘맨발의 청춘’ 등 영화포스터를 가위로 오려서 노트에 붙이며 놀았다. 상상력이 커지는 시간이었다. 고모의 상술을 보며 배우는 협상력은 덤이었다.
졸업식에 장모는 오셨지만 정작 고모는 없었다. 천국은 천재가 아니라 천사가 가는 곳이라 믿는다면 그분은 분명 거기서도 장사를 하고 계실지 모른다. 워낙 셈이 분명하고 또 누구에게나 친절한 분이기 때문이다.
‘행쇼’(행복하십쇼)라는 제목의 특집프로를 연출하면서 원로연예인들에게서 한 수 배웠다. 그들이 시종일관 강조한 내용은 행복의 동의어가 행운이나 만족이 아니라는 것. 그렇다면 과연 무얼까. ‘감사’가 정답이다. 행복한 것은 감사한 것이고 감사한 것은 행복한 것이다.
솔직히 책 많이 못 읽은 게 자랑은 아니다. 하지만 난 신문, 아니 신문지를 읽으며 영양을 보충했다. 신문지는 어린 시절 나의 ‘원기소’였다. “그러니까 그 정도밖에 안 되지”라고 비난한대도 전혀 화가 안 난다. 왜냐고? 나는 늘 그 정도에 감사하기 때문이다.
주 철 환 JTBC 대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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