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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김의 오답노트

구름뜰 2013. 3. 29. 08:37

 교직을 떠난 지 30년도 넘었는데 아직도 제자들을 만난다. 복 받은 삶이다. 나는 이 행위를 ‘교육의 애프터서비스’라 부른다. 출고(?)시켰다고 끝이 아니다. 고장은 없는지, 사고는 안 났는지 수시로 점검한다. 교환해 줄 순 없지만 수리만큼은 성실히 해주는 게 교사의 역할이다.

 쓰린 앙금이 있다면 재회가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착각이 아니길 바라지만 우리 사이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만나면 어김없이 옛날 얘기를 하고 옛날 노래를 부른다. 추억의 내무반이 아니라 추억의 교실이다. 술잔이 오가며 눈물 없던 시절로 함께 떠난다. 종업원이 와서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라고 할 때가 되어야 우리의 수학여행은 비로소 끝난다.

 연예인이 된 제자도 있으니 얘기는 더 풍성하다. 배우 최민수는 나를 ‘국어는 안 가르치고 노래만 가르치던 선생’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한다. 아마 국어 가르칠 땐 졸고 노래 부를 땐 깨어 있었던 모양이다. 노래의 힘이 세긴 세다. 스승의 날 특집으로 함께 출연한 라디오에선 느닷없이 나를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키팅 선생으로 묘사했다. 모교에 부임한 게 닮았고 교장선생님께 자주 불려간 점은 비슷하다.

 수업 방식이 조금 다르긴 했다. 진작부터 PD 마인드로 무장한 걸까. 나름대로 포맷이 있었다. 우선 교과서와 신문을 학습자료의 8 대 2, 혹은 9대 1로 구성했다. 그래야 살아 있는 교육이 된다는 게 소신이었다. 오프닝에선 그날의 뉴스가 소재였다. “여러분 어제 그 뉴스 보셨나요? 그 사람은 왜 그런 말을 했을까요? 아니 왜 그런 식으로 얘기했을까요?”

 이해를 돕기 위해 시범학습에 들어간다. 칠판에 오늘의 속담 두 개를 쓴다. 요즘 같은 국민경종시대에 걸맞은 걸로 골랐다. 우선 “강아지 똥은 똥이 아닌가”. 나쁜 짓을 조금 했다고 해서 아예 발뺌을 할 수 없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발을 뺀다고 똥 묻은 발에서 냄새까지 빠지는 건 아니다. 이어지는 속담은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 현실에선 말 한마디로 빚을 갚기도 하고 도리어 빚을 지기도 한다.


 드디어 주인공의 등장. 오늘의 스타는 탤런트 김혜수씨다. 드라마에서 ‘엣지 있다’는 말을 유행시킨 ‘시크한’ 연기자다. 청룡영화제가 열릴 즈음도 아닌데 왜 무대 아닌 교실에서 화제에 올랐을까. 그녀가 석사였는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을 텐데 갑자기 학위 논문이 표절시비에 오른 탓이다. 국회 인사청문회의 불똥이 연예계로까지 튄 모양새다.

 김혜수씨는 그러나 달랐다. 표절의 정도가 다른 게 아니라 사과의 시점과 수위와 태도가 달랐다. 우선 그는 신속하게 잘못을 인정했다. 여기서 국어교사는 밑줄을 긋는다. “사과는 신속하게, 다짐은 신중하게” 표현의 수위도 적절했다. 흔히 변명의 전주에 등장하는 ‘드릴 말씀은 많지만’이 아예 없어서 좋았다. 실상 그 부분이야말로 필요하지도 않고 효과적이지도 않다. 억울하다고 본인이 말하면 그 억울함은 곧바로 변명의 영역에 편입된다. 이쯤에서 국어교사는 간결체의 가치를 환기시킨다. 길게 쏟아내는 만연체는 감흥이 덜하다. 당연히 감동이 없다. “이유 불문하고 잘못된 일이며 깊이 반성한다. 해당 석사학위를 반납하겠다.” 사과도 당당하게 하면 공감할 수 있음을 그는 연기가 아닌 실체로 보여주었다.

 그가 제출, 아니 반납한 논문 제목이 ‘연기자의 커뮤니케이션 행위에 관한 연구’란다. 내용은 보지 못했고 표절시비까지 올라 먹물이 번졌지만 그동안 숱하게 보아왔던 ‘태도의 결핍과 내용의 공허함’에 실망한 사람들에게 그의 커뮤니케이션 행위는 다분히 시사적이다.

 슬기로운 학생은 정답 외에 따로 오답노트를 갖는다. 정답만 외워서는 세상살이에 불충분하기 때문이다. 애프터서비스가 필요한 친구들, 이른바 고장난 사고방식을 가진 친구들은 허겁지겁 시험에 닥쳐 정답 외우기에만 급급했던 건 혹시 아닐까. 답이 틀리면 가리고 지우기에 바빴던 건 아닐까.

 점 하나 차이로 님이 남이 되는 세상이다. 그러니 까딱하면 스타의 빛도 빚이 된다. 김혜수씨가 이번 사과로 팬들에게 진 빚을 다 갚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상당 부분 마음의 짐을 던 건 분명해 보인다. 반성하고 다짐했으니 이제 실천과 지속이 남았다.

-주철환 JTBC 대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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