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런데 뜻밖입니다. 그렇게 책을 많이 읽는 이들도 통찰력은 제각각입니다. 책을 많이 읽는다고 통찰력이 더 강한 것도, 책을 적게 읽는다고 통찰력이 더 약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한 달에 열 권 읽는 사람보다 한 달에 한 권 읽는 사람의 통찰력이 더 번득일 때도 있더군요. 그래서 더 유심히 살폈습니다. 강한 통찰력의 소유자들. 그들은 대체 무엇이 다를까. 공통점이 있더군요. “어유, 내가 통찰력은 무슨…”하면서도 꼭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책을 많이 읽기보다, 책을 깊이 읽으려고 노력한다.”
아하! 싶더군요. 창고에 오래 묵혀둔 책에서만 곰팡이가 피는 게 아니었습니다. 지금 손에 들고 내가 읽는 책에서 곰팡이가 필 수도 있더군요. ‘명상’이 생략된다면 말입니다. 좌선한 채 고요히 앉아 있는 게 명상이 아닙니다. 깊이 묻고, 깊이 생각하고, 깊이 궁리(窮理)하는 게 명상입니다.
독서를 할 때는 책과 내 마음이 마주 앉습니다. 책에는 문고리가 있습니다. 온갖 정보와 지식, 저자의 경험이 담긴 창고를 여는 문입니다. 독자는 그걸 열고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게 다는 아닙니다. 독서에는 또 하나의 문고리가 있습니다. 그건 책과 마주한 내 마음의 문고리입니다. 그 문고리는 책만 읽는다고 잡히진 않습니다. 책의 내용에 대해 깊이 묻고 궁리할 때 비로소 잡히는 문고리입니다.
책에도 길이 있고, 내 마음에도 길이 있습니다. 책에 난 길을 걸을 때 ‘지식’이 쌓입니다. 내 마음에 난 길을 걸을 때 ‘지혜’가 생겨납니다. 책 속에 난 길도 걷고, 내 마음속 오솔길을 향해서도 깊숙이 걸어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내 안에 ‘길 눈’이 생깁니다. 길을 보고, 길을 알고, 길을 내는 눈. 그게 통찰력입니다. 어찌 보면 “성경책을 1000번 읽었다”는 건 안타까운 고백입니다. ‘1000번을 읽어도 모르겠더라’는 절규가 깔려 있으니까요. 차라리 성경을 한 구절만 읽고, 거기에 대해서 1000번 묵상(명상)을 했다면 어땠을까요. 그럼 내 안에 성경을 보는 ‘길 눈’이 생겼을지도 모릅니다.
페르시아 속담을 다시 읽어봅니다. ‘달을 찾으려면 연못이 아니라 하늘을 보라.’ 통찰력도 똑같습니다. 책에 나 있는 길만 따라가면 ‘지적인 사람’이 됩니다. 책에 난 길을 보며 내 마음에도 길을 낼 때 ‘지혜로운 사람’이 됩니다. 그게 통찰력입니다. 우리의 삶을 헤쳐가는 ‘길 눈’입니다.
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