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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과 밖은 하나

구름뜰 2015. 6. 18. 19:39

 

  • 갸 려져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건 아니며
    보인다고 다 봤다 말못해
    존재하는 양면은 언제나
    동거하거나 별거해 있다

     

     



    며칠 전 금이 간 유리를 갈아 끼우려 커다란 창을 들어냈을 때, 갑자기 휑한 기운이 들며 잊고 있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아마 중학생 무렵이었을 것이다. 나의 집은 신작로에서 한참을 들어가는 골목, 주택가에 있었다. 시멘트 블록으로 둘러싼 담을 가진 집들이 많았지만 간혹 문간방처럼 담 자체가 집의 벽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어느 날 하굣길에 골목을 지나다가 낯선 광경 하나에 시선이 붙박인 일이 그것이다. 장마 끝이었는지, 태풍이 지나갔는지 그 기억까진 없지만 어느 집 벽 한 면이 허물어져 방 내부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무뚝뚝하고 무채색 일변도인 단조로운 골목 풍경에 일순 아기자기하고 알록달록한 속옷처럼 내부가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허물어진 벽을 통해 적나라하게 공개된 방 안의 모습은 내 집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흡사 부지불식간에 들킨 경우처럼 민망하고 당황스러웠다. 방 안에는 낮은 호마이카장 위로 개어 얹은 꽃무늬 이불이 있었고 작은 책상 위에 몇 권의 책과 거울, 그리고 알록달록한 화장품과 헝클어진 옷들이 수습할 시간도 없이 불려나와 있었다.

    이곳이 조금 전까지 비밀스레 혼자 꿈꾸고 잠자고 밥을 먹던 곳이란 말인가. 저 허술하기 짝이 없는 공간에서 누군가 힘겨운 고민을 하고 사랑을 하고 또 슬픔을 삭이기도 했을 것이다. 벽지에는 사람의 인기척이 남아 있는 듯했고 반들거리는 노란 장판은 아직 온기가 있는 듯해 손을 넣어보고 싶기도 했다. 그곳에 조금 전까지 인간의 몸을 뉘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자 부끄러움은 슬픔으로 바뀌어 갔다.

    그때 무엇보다 뚜렷이 각인된 사실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쪽은 안이고 다른 쪽은 밖이라는 경계에 대한 것이었다. 도대체 저 벽 하나에 의지하여 그동안 안심하고 의심했으며 위로받고 불안했던 인간의 마음이란 건 과연 무어라 설명해야 할까. 그 생각이 당시 어린 나에겐 상반되는 개념에 대한 최초의 사유였던 셈이다. 벽이 없어지자 안과 밖은 하나이며 안심과 불안도 하나였으며 어둠과 밝음도 하나인 것에 대해 설명하지 못한 채 사춘기를 건너오고 있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흘러 시를 쓰는 사람이 되어 살아오는 동안 그때의 정서나 사유는 의식하든 않든 시 안에서 기록되거나 변주되었을 것이다. 양 극단인 개념들이 결국은 한 몸이라는 인식, 그건 어떤 정황들마다 또 다른 나를 보거나 삶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작용했겠지만 어릴 적 그 작은 방의 달콤하고도 은밀했던 모습은 잊히지 않는다. 그런데 왜 나는 그 방 안 풍경에서 슬픔을 먼저 읽어야 했을까. 허물어질 정도의 가난 혹은 삶의 곤고함 따위가 아닌, 말하자면 보이고 싶지 않은 개인의 영역이 무참히 누출된 수치 혹은 비참 때문이었을까.

    현상들은 늘 그뿐이다.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며 보인다고 다 보았다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존재하는 양면은 언제나 시침을 뚝 떼며 동거하거나 별거했으며 유정하거나 무정하게 그냥 그렇게 있었던 것 같다. 깨진 유리창으로 팔을 집어넣으면 팔은 안인가 밖인가. 혹은 옆자리와 경계를 지워준다고 한가운데 있는 자바라를 주룩 당기면 바로 두 토막이 나는 식당의 방처럼, 이곳과 저곳은 같은 곳인가 다른 곳인가. 텅 빈 창으로 조금 전까지 있던 안이 사라지고, 이쪽이 사라지고, 내 것이 사라지고, 그 자리 서늘하고 낯선 공기가 원래의 제 집으로 밀고 들어오는 게 보였다.
    이규리 시인